미국 유학기 (6) – 힘들고 고달팠던 예일대 재학 시절

예일대학교 도서관 근처 풍경

뉴헤이븐에 모든 짐을 풀고 집도 정하고 조금씩 도시가 익숙해 질 즈음 예일에서의 첫 학기가 시작했다. 사실 예일에 입학하기 전에 석사 프로그램이 2년 과정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학과 홈페이지에 가면 학과 신입생들이 읽어야 하는 가이드가 있는데 귀찮아서 읽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입학하고 나서 읽으니 석사 프로그램이 1년에서 4년까지 유동적으로 할 수 있는데 일정 이상의 성적이 되어야지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만일 1년에 마칠 역량이 된다면 1년에 끝내도 되고, 시간이 안 되고 역량이 부족하다면 4년까지 지속할 수 있는데 졸업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예일 전산학과 대학원에서 석사로 졸업하기 위해서는 학점 평균이 High Pass 이상이 되어야 하고 Honor 학점도 최소 하나가 있어야 한다. (예일은 특이하게 A, B, C 식의 학점이 아니고 Honor, High Pass, Pass, Fail 식의 학점을 준다. 그리고 Honor 학점을 받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리고 그 당시1년에 $32,500에 달하는 학비는 결혼해서 바로 유학 온 본인의 가족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첫 번째가 1년 안에 졸업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가 졸업 후 바로 취업이었다.

예일에 공부한 첫 학기는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국에서 정규 학위를 한 것은 처음이었고 그것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교에서 뛰어난 친구들과 경쟁을 한다는 것이 많은 부담으로 다가왔다(실제로 중국에서 온 동기들의 이력서를 보게 된다면 그 학교 학과 수석도 꽤 있었고 칭화대(Tsinghua)를 졸업한 재원도 꽤 있었다). 언어적 충격, 문화적 충격, 그리고 학업적 충격이 모두 겹쳐서 첫 학기에 느꼈다는 것이 제일 간단하게 예일에서의 첫 학기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예일대학교 전산학과(Computer Science Dept.) 건물

아무튼, 첫 학기의 성적은 정말 처참했다. 첫 학기는 컴파일러(Compiler and Interpreter),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분산 시스템(Building Decentralized Systems), 객체지향 프로그래밍(Object-Oriented Programming), 그리고 연구 윤리(Ethical Conduct of Research)를 들었는데 가장 열심히 했고 재미있게 들었던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은 아쉽게 High Pass를 받았고, 어느 정도 선방한 분산 시스템도 High Pass를 받았지만, 컴파일러와 인공지능 수업에서는 Pass 밖에 받지 못했다. 사실 대부분의 석사 동기들이 Computer Science(이하 CS)를 학부에서 전공했기 때문에 이 수업은 학부에서 듣고 다시 대학원에서 좀 더 높은 레벨로 듣는 것이다. 나는 학부에서 CS가 아닌 Electrical Engineering(이하 EE)를 전공했기 때문에 Data Structure이외의 CS수업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KAIST의 전자와 전산이 졸업 시에 통합되어 졸업증서에는 EECS로 나오지만 실제 세부 전공은 EE). 그래서 첫 학기에서 이렇게 고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두 번째 학기는 모바일 컴퓨팅 및 무선 통신망(Mobile Computing and Wireless Network), 계산 비전 및 생물학적 지각(Computational Vision and Biological Perception), 데이터베이스(Introduction to Databases), 통계 유전학 및 생물정보학(Statistical Genetics & Bioinformatics)를 들었는데 정말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공부를 했다. 우선은 첫 번째 학기에 좋지 않은 성적이 나왔기 때문에 전체 학점을 만회하기 위해서 최소 2개의 Honor를 받아야 했다. 한 학기에 Honor 한 개를 받아도 감지덕지한데 Honor 2개를 받는 것도 무리수로 보였고 다른 과목들도 최소 High Pass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본인이 느끼던 부담감은 상당했다. 또한, 두 번째 학기에 취업 인터뷰를 계속 보면서 취업 준비에도 상당한 준비를 해야 되었기 때문에 하루에 3~4시간을 취업 인터뷰에 할애했다.  만일 전화 인터뷰가 들어오면 공강 시간에 인터뷰를 잡아서 보고 나머지 시간에는 새벽 3~4시까지 학과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정말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졸업할 수 있을지 그리고 미국 취업을 할 수 있을지를 가지고 항상 고민하고 염려했던 것 같다. 우선 경제적인 문제가 관건이었다. 한 학기 정도 생활 할 비용을 들고 와서 나머지는 예일에서 제공했던 국제 학생론(International Student Loan) 프로그램으로 감당을 하고 있었는데 만일 한 학기를 더하게 된다면 한 학기 학비 대충 2000만원에다 의료 보험, 아파트 렌트비, 그리고 생활비를 합해서 거의 3000만원의 비용이 들게 된다. 그리고 만일 어떻게 졸업은 하더라도 미국 취업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OPT 문제로 졸업 후 3개월 정도 안에 미국을 떠나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다른 대책도 마련해 놓아야 했다 (미국 내 무임금 인턴을 하거나 다른 학교에 전학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그 시절만큼 고민이 많고 힘든 적은 많이 없었던 것 같다. 결혼해서 바로 미국에 왔기 때문에 가족도 돌봐야 하고 내 갈 길도 개척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잠을 줄이고 날마다 입사 지원을 하고 전화 인터뷰 기회가 생기면 어떤 일이든 마다치 않고 우선 인터뷰를 봤었다. 그 당시 나에게 회사를 골라간다는 것은 사치였다. 무조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채용하는 곳이면 연봉, 조건 상관하지 않고 지원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어떻게든 졸업을 1년에 하기 위해서 공부에 매진해야만 했었다.

두 번째 학기를 마치고 성적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내가 한 학기 동안 열심히 한 결과에 따라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학기를 끝내고 졸업하지 못한다면 최소 한 학기를 더 해야 하고 그러면 생활비를 합해서 3000만 원의 비용이 더 들게 된다.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지부터 계획이 없었고 안 그래도 온 힘을 다해서 석사 과정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떻게 한 학기를 더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최종 성적이 뜨는 날 성적을 확인한 순간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번 학기에는 하나도 받기 힘든 Honor 학점을 3개나 받은 것이었다. 첫 학기에 Pass를 두 개 받아서 High Pass 평균으로 졸업하기 위해서는 Honor를 2개 이상 받아야 했는데 다행히 졸업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당시 나의 Academic Advisor였던 Holly Rushmeier 교수님도 내 1학기 성적이 좋지 않아서 졸업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2학기 성적이 아주 잘 나온 것을 보시고 아주 기뻐해 주셨다. 예일에서의 1년은 정말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최선을 다하면 길이 조금씩 열린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예일 석사 시절의 성적표. 지금은 한 장의 종이로 남아 있지만 나에게는 그 시절의 고생과 노력의 결과이다

새로운 도전 – 웹프로그래밍

한동안 블로그에 글을 쓰지 못했다. 회사 일이 너무 바쁘기도 했었고 아이들을 기르면서 시간이 따로나지 않아서 글을 적을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미국 회사에 다니는 덕분에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아이 양육에 있어서 양가 부모님이나 친척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어서 양육을 온전히 다 담당해야 한다. 작년에는 와이프가 둘째를 임신하고 우리 가족이 회사에서 1시간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간 탓에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아침에 회사를 가면서 딸을 데이케어에 보내고 회사 일을 끝내고 오는 길에 다시 데리고 오면서 하루에 거의 3시간 이상을 길에서 보내고 나니 집에 와서는 다른 무엇을 할 여유를 쉽게 가지지 못했다. 회사 일을 하고 가족을 돌보기만도 벅찬 2015/2016년이었다.

회사에서는 이례적으로 Enterprise Rotation Program(ERP)라는 것을 시행하고 있었다. 운좋게도 본인이 속한 그룹에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7명 중에 한명이 되는 행운을 누렸다.이 ERP 프로그램은 매년마다 팀을 바꿔가면서 엔지니어로서의 다른 역할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미래에 매니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나로서는 내가 일해왔던 BIOS/UEFI 같은 로우레벨 시스템 펌웨어 분야뿐만 아니라 델에서 하는 다른 분야의 엔지니어링도 경험해 보고 싶었다. 매년마다 본인이 지원할 수 있는 잡 리스트가 나오는데 자신이 제일 가고 싶은 3가지 팀을 골라서 지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팀에서 짧으면 10개월 길게는 14개월까지 보내면서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이다.

본인도 3개의 새로운 일을 지원했지만 그 일들을 얻지는 못했다. 제일 우선 순위였던 일은 로테이션 프로그램에 뽑힌 사람들이 대부분 지원해서 최종 선발에서 고배를 마셨고 두번째 우선 순위였던 일은 첫번째 우선 순위였던 일과 같은 팀이었는데 이미 한명을 뽑았기 때문에 그 팀에서 추가적으로 한 명을 더 뽑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새번째 일은 본인에게 제안이 들어왔는데 너무 잦은 출장 때문에 본인이 거절했다(한달에 한번씩 실리콘밸리에 출장을 가야했다. 당시 육아라는 사정도 있었고 와이프가 임신해서 가족을 돌보기 힘들 것 같았다). 결국 로테이션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커미티에서는 나에게 시스템 엔지니어라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직군의 일을 주었다.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는 1년 동안 프로그래밍과는 거의 담을 두고 쌓았다. 본인은 맡은 일은 PCIe SSD라고 SSD에 PCIe Interface를 다이렉트로 연결해서 전송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스토리지 제품이었는데 아직 개발 초기 단계라서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PCIe SSD: 획기적으로 빠른 Read/Write속도 때문에 요즘 서버 분야에 많이 쓰이고 있다 (출처: Howtogeek)

매일 랩에 가서 서버들에 PCIe Analyzer를 연결해서 프로토콜을 분석하고 Principal Engineer들과 디버깅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PCIe Analyzer가 상당히 민감해서 서버에 새로 연결을 하거나 Interposer라는 측정 기기를 변경하면 파라미터가 달라져 깨끗한 신호를 얻기 위한 캘리브레이션(Calibration)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했다. 말로는 단순하지만 처음에는 깨끗한 신호를 얻기까지라도 2~3일이 걸리는 일이었다. 대학원 때 PCIe Analyzer를 많이 다뤄봤다는 사람도 깨끗한 신호를 뽑기 위해 몇 시간을 보내고 그게 안되면 측정 기기 제작회사에 사람을 불러서 도움을 받는 판에 PCIe에 초보자인 나로서는 참 힘든 나날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생판 모르던 PCI Express 프로토콜을 보면서 분석하는 일은 정말로 힘든 것이었다. PCI Express 프로토콜에 대해서 기본 개념도 없고 뭐가 뭔지도 모르는 판에 하루 종일 아래와 같은 화면을 보고 스펙을 보고 있으면 하루 종일 머리가 많이 아프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PCIe Analyzer에서 나오는 프로토콜 분석 화면 (출처: Teledyne 웹사이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 매일 코드를 보면서 로직을 분석하고 디버깅을 하다가 이 팀에서는 측정 기기 때문에 며칠을 허비하고 매일 매일 테스트에만 몰두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정말 프로그래밍이 하고 싶었다. 매일 매일 코드를 짜고 디버깅을 하던 그 날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 팀에서 1년을 보내기로 한 이상 시스템 엔지니어로서 일을 해야만 했다.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서 일이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그 팀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가족을 돌보는 것이었다. 첫째 딸이 두살 반이 되던 시기라서 부쩍 활동이 많아지고 집이 좁아서 자꾸만 밖에 나가자고 하는데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맘껏 뛰어 놀 수 있는 환경이 되질 못했다. 이전 팀에서는 일주일에 이틀은 집에서 일해서 육아를 좀 더 도와줄 수 있었는데 로테이션 1년차 팀에서는 무조건 랩에서 일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서버와 측정 장치가 모두 랩에 있고 집으로 옮기는 것이 힘들다). 매일 회사에 있으니 와이프가 감당해야 되는 일들이 많아져 와이프도 지치고 본인도 감당해야 되는 일이 급격히 많아져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 가끔 팀에서 프로그래밍을 할 기회가 있어 본인이 자원해서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었다. 회사에서 어떤 필요에 의해서 로봇팔을 사게 되었는데 이것을 컨트롤하는 펌웨어를 만들었고 다른 프로젝트는 Python을 가지고 테스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것이라도 없었으면 정말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하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았을 것 같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다음 팀을 고르게 되었다. 이번에는 가고 싶은 팀의 매니저와 먼저 연락해서 인터뷰도 하고 팀원들도 3명 정도 미리 만나서 어떤 일을 담당하게 될 것인지 미리 얘기를 다 들었다. 다행히 금년은 본인이 1순위로 꼽은 팀에 가게 되었고 웹 프로그래밍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게 되었다.

사실 하이레벨 프로그래밍을 무척이나 하고 싶었다. C/C++, Java는 익숙하지만 웹이라는 것은 나에게 생소한 분야였고 배경 지식도 전무한 상태였다. 다만 한가지 준비된 것이라고는 예전에 근처에 있는 Austin Community College에서 온라인 강의로 Javascript, HTML, CSS를 배워서 Front-end 웹 프로그래밍에 있어서는 조금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감은 있었다. 그 어려운 시스템 펌웨어를 만들고 디버깅 환경이 힘든 상황에서 백만 줄 이상의 코드를 다루는데 디버깅이 잘 되는 웹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은 훨씬 쉽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CS를 전공하고 프로그래밍 백그라운드가 어느 정도 되어있으니 웹 관련 프로그래밍도 빨리 배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막말로 컨솔에 값들을 다 찍어볼 수 있는데 뭐든 못하겠냐는 생각도 있었다 (바이오스에서는 특정 변수 값을 찍어보기가 무척이나 힘들고 어셈블리어를 따라가면서 분석해야 한다)

지금 두번째 로테이션 팀에서 본인이 하는 언어는 Javascript, Typescript이고 Framework로는 Angular JS, 그리고 라이브러리는 Lodash, JQuery 등도 다룬다. 그리고 백엔드 단에서는 Node.js를 다루는데 정말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프로그래밍은 바이오스를 할 때보다 훨씬 편해졌지만 배워야 될 배경지식이 정말 많고 웹에 관한 많은 지식을 쌓아야 되는 것이다. 15년 전에 Javascript를 다뤄보았고 미국 와서 학교 온라인 강의도 들어보았지만 요즘에는 Javascript라는 언어가 많은 플레임워크와 라이브러리가 나왔고 예전에 비해서 훨씬 복잡한 로직들을 처리하게 되었다(오래전부터 쓰고 있던 Javascript는 널리 쓰이기도 하지만 객체지향 및 타입 체크 부분에서 단점이 많아 마이크로스프트에서 Typescript라는 호환되는 언어를 만들었다. Typescript를 컴파일하면 Javascript 파일이 생성되게 된다). 또한 요즘에 핫한 이슈인 Node.js를 배울 수 있어 정말 이번 팀은 선택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떠오르는 Node.js

그리고 한가지 좋은 점은 일주일 내내 집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팀에 여기서 비행기로 6시간 이상 거리에 있는 뉴햄프셔에 있다. 나는 리모트로 그곳의 서버에 연결해서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매일 전화로 회의를 하고 코딩은 집에서 원격 컴퓨터에 연결해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원격 근무가 가능한 것은 본인이 소프트웨어 일을 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어디에 있든 네트워크로 연결만 된다면 코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10시에 회의를 하고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면서 코딩하고 디버깅하고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파트너에게 전화해서 같이 문제를 의논한다. 처음에는 원격 근무를 잘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나서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으려니 몇 년은 이렇게 일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회사에 몇 년 이상을 다니고 가족이 늘어나다보면 사람이 자연적으로 안정 지향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예전에 하던 편한 것 그리고 익숙한 것을 찾게 되지 새로운 것과는 조금 거리를 두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도 어쩌면 한동안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아이가 태어나고 키우게 되는 몇 년은 부부에게 가장 힘든 날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선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게 되고 자기만의 시간은 사치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아이들 때문에 여러 제약을 많이 받게 된다(첫째 때는 한번 밖에 나가서 먹으려고 해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이번에 웹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좋았던 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회사에서 주는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했는데 몇 년동안 일을 하다보니 내가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 그건 바이오스가 아니었던 것 같다. 같이 일하던 동료는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나는 좀 더 하이레벨의 어플리케이션 분야의 프로그래밍을 더 선호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만들어보고 운용해 볼 수 있는 웹 프로그래밍이 나는 정말 하고 싶었다.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고 도전이기도 하다. 원격으로 일하는 것이라 아직 여러가지 제약이 있지만 금년 로테이션을 하는 동안 이 팀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고 또 많은 것들을 남겨주고 왔으면 좋겠다.

 

 

미국 유학기 (5) – 뉴헤이븐(New Haven) 에피소드

2010년 8월 5일에 뉴욕 JFK 공항을 통해서 미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미국은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어서 나에게는 여전히 미국은 낯선 나라였다. 다행히 한국에서 미리 만나 알고 있었던 예일 로스쿨에 다니던 친구들이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고 한 한인 교회의 사모님께서 운전을 해주셔서 별 문제없이 뉴헤이븐까지 올 수 있었다.

사실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예일대가 위치한 뉴헤이븐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검색을 해보았다. 내가 찾아본 정보에서는 뉴헤이븐에 대해서 좋지 않은 얘기가 많았다. 우선 치안 문제가 좋지 않아서 다운타운에는 밤에 걸어다니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이 도심에 살고 부유한 사람들이 교외에 사는 경우가 많은데 뉴헤이븐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범죄율이 높은 도시여서 밤에 나가는 것은 절대 안되고 낮에도 다닐 때 사람들이 많은 거리로 다니라는 조언도 보았다.

JFK 공항에서 뉴헤이븐까지는 거의 2시간이 걸렸는데 예상했던 대로 뉴헤이븐의 처음 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어두침침하고 음침한 도시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고 그렇게 반가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숙소는 다행히 수소문해서 알게 된 한 예일 경제학과 박사 과정인 형의 방에 묵게 되었다. 처음 와이프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 형은 한국에 계셔서 보지는 못했지만 자기 방을 빌려 줄 정도로 좋으신 분이셨다. 그 방에서 짐을 풀고 샤워를 한 다음에 정말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그 아파트는 전체 빌딩이 10층 정도의 큰 아파트였는데 상당히 많은 수의 입주자들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출입 카드가 없으면 문을 열수도 없었으며 낮에는 관리인이 앞에 앉아 있어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했다. 관리인에게 낯선 얼굴이었던 나와 와이프는 몇 번 들락날락하던 중에 우리가 어디를 방문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듣게 되었다. 나는 잘 안 되는 영어로 설명을 하며 우리가 아는 사람의 방을 서블렛(Sublet)했으며 한동안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서블렛이라는 것은 렌트한 방을 다른 사람에게 일정기간 빌려주는 것이다. 사실 여름에 한국을 방문하는 일이 잦은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서블렛하는 것이 빈번하지만 집주인이 알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좋아하지 않는다) 이게 실수였다. 이 아파트는 서블렛이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관리인은 당장 우리에게 1층 끝에 위치한 관리 사무실에 가서 얘기하라고 했다. 관리인이 계속 보고 있어 우리는 관리 사무실에 가서 시킨대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관리 사무실 매니저의 말로는 서블렛이 금지되어 있으니 우리가 나가야 하고 그 방을 렌트하던 형도 벌금을 받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대신에 우리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겠으니 내일 나가라고 했다.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어제 미국에 도착해서 시차에 조금 적응하고 있는데 내일 나가라니. 그리고 집이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너무 깜깜했다. 근데 이미 관리 사무실에서 그렇게 얘기를 들은 상태에서 나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매일 문 앞에서 관리인이 또 지키고 있으니 피해 다닐 수도 없었다.

오후에 와이프와 함께 근처 호텔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그 아파트에서 가까운 호텔을 무작정 찾아가서 하루 묵는데 비용이 얼마가 드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 찾아간 곳이 The Study at Yale Hotel이었다. 이 호텔은 보기에도 모던하고 깔끔하게 잘 지어진 호텔이었다. 인테리어도 맘에 들고 깨끗해서 괜찮을 것 같았지만 문제는 비용이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루 묵는데 최소 180불이었다. 집을 언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시점에서 여기 호텔에 묵었다가는 예산에 큰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두 번째 찾아간 곳은 Hotel Duncan이었다. 이 호텔은 첫 번째 호텔 근처에 있었는데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건물이었고 특히나 둘러본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서 와이프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호텔비는 하루에 70불 정도로 상대적으로 저렴했었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별로였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이 호텔의 방을 구경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탔었는데 그 엘리베이터가 미국 옛날 영화에서나 보던 쇠창살이 있어 손으로 열고 닫는 아주 오랜 된 것이었다. 내부에는 이 엘리베이터가 뉴헤이븐에서 가장 오래 된 엘리베이터라고 자랑(?)스럽게 적어놓은 종이도 있었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누가 가장 오랜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어할까?)

근처 호텔을 둘러보고 괜찮은 곳을 찾기가 힘들어 이곳 저곳 수소문해서 아파트 렌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근처에 다른 아파트 관리 사무실이 있었는데 이 사람을 통해서 알아보기 그곳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 방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내일 나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떤 집이라도 우선 보고 싶었다. 그 관리 사무실의 사람을 따라서 “Regency”라는 아파트의 방을 같이 구경해 봤는데 스튜디오(Studio: 한국의 원룸과 비슷한 구조. 따로 있는 방이 없고 거실과 키친이 하나로 되어 있고 화장실이 하나 있는 구조) 방이었고 렌트는 825불이었다. 방은 그래도 깨끗했고 지금 지내고 있는 아파트와 멀지도 않아서 짐을 옮기는 것도 수월할 것 같았다. 대충 점검을 해보고 1년 리스 계약을 맺었다.

그 날 오후와 저녁에는 계속 큰 짐들을 옮긴다고 힘들었다. 거의 100킬로가 넘는 짐을 이민 가방 여러 개에 나눠 담고 왔고 이것 저것 자잘한 짐들이 많아 옮기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새로 옮긴 집에는 아무 가구도 없어서 근처 월그린(Walgreen: 미국의 약국 프랜차이즈. 여기에서 식료품과 생활 용품도 판다)에서 7불에 얇은 담요 두 장을 사서 바닥에 깔아놓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small_Regency Apt 1

뉴헤이븐에서 살았던 아파트: 처음에 와서는 담요 2장을 깔고 생활했다

저녁에 샤워를 하는데 왠걸 샤워기에서 녹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짐을 들고 온 미국으로의 힘든 여행과 여러 일련의 사건들로 지쳐 있던 와이프는 녹물을 보더니 급기야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아파트가 음침하고 위치가 그렇게 좋지 않았고 그리고 상태도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렌트가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와이프 마음에는 그렇게 들지 않아도 이곳에 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small_Regency Apt 2

키친이 워낙 낡아서 냉장고는 잘 동작하지 않았고 Dishwasher는 물이 새기 일쑤였다.

그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여러 에피소드가 많았다.

우선 아파트가 7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항상 말썽이었다. 중간에 서는 일도 잦았고 고장 나서 아예 운행이 되지 않는 일도 많았다. 6층에 사는 우리로서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6층까지 걸어 올라가고 걸어 내려가야만 했었다. 이게 보통 때는 괜찮은데 만일 장을 보고 온 날에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있으면 짐을 6층까지 옮기느라 정말 힘들었다. 차가 없던 우리로서는 렌트카를 2~3주에 한번씩 빌려서 장을 보러 다녔는데 2~3주동안 필요한 음식과 과일, 그리고 생필품들을 사면 짐이 상당했다. 특히나 페트병에 들어있는 물을 코스트코(Costco)에서 사면 무게가 상당한데 이것을 6층까지 옮기는 것도 큰 일이었다. 그렇다고 곧 반납해야 되는 렌트카에 놔둘 수도 없으니 어쨌든 짐을 나눠서 6층까지 옮겨야만 했다. 한번은 근처 월그린에서 스타벅스 커피를 대대적으로 할인해서 수십병을 사놓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한 병에 그 당시 3500원 정도였는데 거기서는 1달러도 안해서 스타벅스 병 커피를 좋아하던 우리 부부는 이렇게 사 놓고 몇 달을 먹었던 것 같다 (사실 그것 때문에 미국 와서 살이 많이 찐 것 같다).

월그린에서 스타벅스 병커피가 할인하는 날 이렇게 수십 병을 사서 방에 재놓고 먹었다

월그린에서 스타벅스 병커피가 할인하는 날 이렇게 수십 병을 사서 방에 재놓고 먹었다

뉴헤이븐의 겨울은 특히나 추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한 면이 완전 창문이어서 방을 따뜻하게 하려고 히터를 계속 틀어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전기로 동작하는 이 히터가 에너지 효율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특히나 추위를 많이 타는 와이프가 있어 건강을 위해서 밤에는 항상 히터를 틀고 잤었는데 나중에 한 달이 지나고 전기세가 나온 것을 봤더니 거의 450불이 나온 것이었다. 렌트비가 825불인데 렌트비의 거의 절반 이상으로 전기세가 나온 것이었다. 나중에 이 방을 소개시켜 준 부동산 업자에게 얘기했던 그 사람이 아주 놀랬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일 년을 계약을 했으니 전기세를 그렇게 내도 살아야 했다.

화장실은 오래 되어서 냄새가 많이 났고 습기가 항상 차 있어서 곰팡이가 자주 생겼다. 냄새가 심해서 자주 향기가 나는 초를 태워서 냄새를 좀 중화시켰는데 이게 그을음이 많이 생겨서 이사하기 전에 그것을 지운다고 고생하기도 했다. 냉장고도 냉장과 냉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아이스크림을 사와도 금방 녹기 일쑤였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식기세척기였는데 식기 세척을 하다가 완전히 차폐가 되지 않아 거품을 토해내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 바닥에 홍수가 나고 재빠르게 물을 막고 거품을 걷어내야 했다.

small_Dishwasher bubble

가끔 식기세척기가 이렇게 말썽을 피웠다

아파트 주변의 환경은 사실 많이 좋지 않았다. 아파트 바로 뒷편에 Salvation Army라고 사람들이 쓰던 중고용품을 파는 곳으로 유명한 비영리 단체가 있었는데 여기에 Rehap 시설(Adult Rehabilitation Center)도 같이 있었다. 이는 알콜 중독자 혹은 마약 중독자들이 위한 재활 시설이었는데 아파트 창문으로 보면 이 사람들이 항상 보였다. 모여서 담배도 피고 식사도 하고 농구도 하는 일상적인 모습이었지만 재활 센터라 그런지 우리의 눈으로는 이 사람들이 항상 무서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근처에는 큰 주차장이 있고 그 주위에 나이트 클럽이 있었는데 주말에는 사람들이 술 먹고 나이트 클럽에서 나와서 싸우는 일이 잦았다. 한번은 토요일 새벽 한 시쯤이었는데 어디서 기관총 소리 비슷한 총소리가 들려서 화들짝 놀라서 깬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아파트 창문으로 봤더니 그 주차장에서 총을 쏘면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었다. 몇 분 뒤 경찰차 7대가 오고 사람들이 다쳤는지 구급차도 오고 하면서 아주 시끄러웠다. 다음 날 일어나서 봤더니 영화에서만 봤던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주차장에 둘러 있었고 나는 그 근처를 지나면서 여기 저기 흩어진 탄피를 볼 수 있었다.

한번은 일요일 오후였는데 그 주차장에서 자동차가 화재가 나서 폭발한 일도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시끄러워서 창문을 봤는데 차가 불타고 있었다. 어떤 일로 그 화재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차가 화염에 싸여 있었다. 곧 화재 진압차가 와서 그 사태는 진정이 되었지만 그 장면은 아직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 중에 가장 큰 에피소드는 옆집 사람이 죽었는데 그 시체 냄새를 한 달 넘게 맡으면서 살았던 일이다. 우리 부부가 살던 6층은 8가구 정도가 같이 있던 곳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도 많이 있던 곳이었기에 누가 자기 나라 요리를 만드나 싶었는데, 그 냄새가 계속 되었고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관리 사무실도 여기는 따로 없어 어디가 물어봐야 될지 몰랐던 우리로서는 그냥 그 냄새를 참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못 참으면 양초를 사다가 문 앞에서 계속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면 냄새가 조금이라도 덜해지기 때문이었다. 냄새가 심하게 날 때는 정말 20개 정도의 양초를 문 앞에서 태울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해야지 역한 냄새가 좀 덜해지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내가 학교에 가고 없는 날 와이프가 혼자 방에 있을 때였다. 누가 문을 두드려서 봤더니 경찰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을 열어줬더니 경찰이 옆 집 사람이 죽은 지 꽤 되었는데 그 사람 아냐고 질문을 했다고 한다. 와이프가 놀란 마음을 진정하면서 옆 집 사람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잘 모른다고 하니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아마 심장마비가 아닐까 싶다) 방 안에서 죽었는데, 연고가 없어 연락도 안되고 렌트도 내지 않아서 관리인이 문을 따서 열어보니 시체가 부패하고 있었다고 했다. 정말 바로 옆 집에 위치했던 우리로서는 그 냄새를 한 달 넘게 맡고 있었으니 정말 생각만 해도 섬뜩했다.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하더니 시체도 치우고 방 카펫도 완전 걷어내고 청소를 철저히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달이 있다가 새로 이웃이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의 웃는 얼굴에 차마 거기서 사람이 죽었다고 하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기서 어떻게 살았나 싶지만 유학생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던 우리 부부에게는 이렇게 정착한 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불편한 것도 많았지만 살아가면서 조금씩 익숙해져서 그렇게 많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지금도 우리 부부에게 이 아파트는 가끔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미국 유학기 (4) – 27개의 미국 대학원에 지원서를 쓰다

12월에 한국에 다시 돌아와 원서를 마감하기 시작했다. 2009년도에 당시 미국 대학원들의 원서 접수 마감은 12월 15일까지였다. 보통 원서 접수를 하는 대학교를 정하는 것은 U.S. News의 미국 대학 랭킹과 전공 랭킹을 많이 참조하게 된다. 그 랭킹을 보면서 나는 Computer Science 분야에서 1위부터 50위까지 대학 리스트를 다 뽑아놓고 모든 대학교의 CS 대학원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정보를 수집하고 엑셀 파일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미국 대학원 40개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사실 미국 대학원에 40개나 원서를 쓰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것이다. 교차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 40개를 쓰든 100개를 쓰든 상관이 없지만 다 합격이 된다해도 입학하는 대학원은 하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40개나 쓰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은 2년 전에 MBA를 미국 10개 대학에 썼지만 올리젝을 받은 기억 때문이다. 그래도 10개 중에 하나는 걸리겠지 하는 생각으로 원서를 썼는데 웬걸 모든 대학에서 나를 거절했던 것이다. 충격도 많이 받았고 그 다음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많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에 지원한 경영학 박사 과정도 그 대학의 교수님께서 관심을 가져주셔서 지원하게 되었고 최종 단계까지 갔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고배를 마시게 되어 또다시 실패를 맛보게 되었다. 2년의 연이은 유학 실패로 내 자신이 위축된 까닭도 있지만 나이도 30살이 된 즈음에 이제는 마지막 도전이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탑 20위 대학에 안 되면 탑 50위 권 내의 대학에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불가능하지만 40개의 대학에 원서를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40개의 대학원에 원서를 쓰는 것은 정말 힘들다. 우선 제일 힘든 것이 추천인을 찾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 대학원에서는 대학원 지원 시에 2~3명의 추천인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CS대학원의 경우 직장 상사의 추천서보다는 대학교 교수님들의 추천서가 훨씬 더 영향력을 발휘한다. 본인이 카이스트 재학시 지도 교수님이셨던 유창동 교수님과 실험실에서 1년 정도 일을 했던 박규호 교수님은 졸업 후에도 가끔 찾아 뵙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추천서를 받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40개 모두를 부탁하기에는 너무 양이 많았다. 서울대 경영대에서 지도 교수님이셨던 박진수 교수님의 추천서도 받을 수는 있었지만 MIS 분야에 국한 되어 있었고 CS 분야 추천서를 받기에는 분야가 너무 달랐다. 그래서 예전에 같이 일했던 직장 상사분들께 추천서를 부탁 드려서 어느 정도 추천서 요구 사항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점수가 되지 않아서 토플 시험을 5번 이상을 봐야 했고 GRE에서 좀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일본에서 시험을 봐야 했다. GRE 시험은 원래 종이 시험(PBT, Paper-Based Test)와 컴퓨터 시험(CBT, Computer-Based Test)가 있는데 한국과 중국에서 GRE 시험 후기를 만들어서 그 후기를 보고 점수가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아져서 한국과 중국은 전면 CBT 시험이 금지 되었다. 그 당시에 알려지기로는 CBT 시험은 똑같은 문제 은행이 한 달을 주기로 바뀌곤 했는데 그 바뀌는 주기의 초기에 사람들이 시험을 보고 와서 인터넷 게시판에 그 문제를 기억해서 올리면 비슷한 문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문제가 복구되곤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런 게시판에 있는 문제들을 다 정리해서 올리면 사람들이 이 문제의 답을 외워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경우도 많았다. 문제는 이렇게 GRE 점수를 높게 받은 사람들이 미국 대학원에 갔는데 영어를 심하게 못했다는 것이었다. GRE의 영어 파트인 Verbal은 미국 사람들도 800점 만점에 700점 이상을 받는 경우가 많이 없는데 그렇게 700점 이상을 받은 친구들이 대학원에 합격해 입학해서 미국 교수들이 대화를 해보면 영어 의사 소통 능력이 심하게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미국 대학원에서 조금씩 GRE 점수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GRE 시험을 주관하는 ETS에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가장 부정 행위가 많은 중국과 한국에서 GRE 시험을 1년에 두번씩 정해진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보는 PBT로 바꾸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PBT시험의 문제는 점수를 받기가 CBT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우선 정해진 시간에 문제를 풀지 못하면 못 푼 문제는 점수를 받지 못하게 되고 문제의 레벨도 상대적으로 CBT에 비해 높았다. 반면에 CBT는 주어진 문제에 대한 답에 따라 수험생의 레벨을 조금씩 측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700점 레벨의 문제를 맞추게 된다면 그보다 높거나 그와 비슷한 문제를 내면서 이 수험생이 정말 700점대의 레벨을 가지고 있는지 테스트를 해보고, 만일 그 문제를 맞추지 못하게 되면 680점 레벨의 문제를 내고 그에 따라서 수험생의 점수 레벨의 상향을 조절하는 것이다. 즉 정해진 시간에 모든 문제를 풀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패널티는 있지만 초반에 잘 맞추었다면 좋은 점수를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한국에서 보는 PBT 시험에서는 GRE 점수를 좋게 받을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 비싼 비행기값을 내고 한 번은 오사카에서 두 번의 시험을 보았고 (GRE는 한 달에 한 번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본에 가는 사람들은 보통 월 말에 가서 한 번 보고 좀 더 체류하다가 다음 달 초에 한번 더 보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후에는 도쿄에 가서 두 번의 시험을 더 보았다. 일본 여행이라고 갔지만 10여일의 시간 동안 불도 밝지 않은 싼 모텔에서 하루 종일 책만 보고 단어만 외우느라 여행이라 불릴 만한 추억을 남기지도 못했다.

원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에세이를 쓰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우선 2년 전 MBA 준비를 할 때 10개 대학마다 다 다른 에세이를 쓰면서 에세이에 쓸만한 거리가 잘 정리가 되어 있었고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되는지 많은 책을 찾아보면서 숙지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보통 4~5개의 긴 에세이를 써야 하는 미국 MBA 지원과는 달리 미국 일반 대학원 에세이는 보통 SOP(Statement Of Purpose)라고 1개의 에세이만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40~50개의 에세이를 썼고 그 기록이 있으니 1개의 에세이를 쓰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다만 학교마다 어떤 점에서 매력을 느꼈고 왜 그 학교에 지원하는지만 다르게 써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학교 조사를 하고 그 부분을 다시 쓰는 것이 필요했다.

원서를 쓰는 데만 거의 3~4개월의 시간을 들였다. 학교 조사도 충분히 해야 했고 학교마다 필요한 토플 성적과 GRE 성적을 리포팅 해야 했으며 교수님 추천서가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필요한 서류들도 체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다음 리스트가 2009년도에 본인이 지원했던 미국 대학원의 목록이다 (하이라이트 된 부분이 최종 지원한 대학이다). 여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University of Arizona의 MIS 프로그램에도 지원을 했고 전체 지원서를 쓰고 준비를 한 대학원은 27개이다.

applied_graduate_schools

위의 리스트 중에서 최종 지원을 하지는 않았지만 교수님 추천서를 받고 토플과 GRE 점수를 리포팅 하는 등 지원 준비를 계속 했던 대학들이 꽤 있다. 이런 대학들은 지원 데드라인이 다음 해 3월 이후에 있어 지원을 계속 미룬 학교들도 있고 연구 분야가 나와 맞는 분야가 없어 지원하지 않은 대학도 꽤 있다.

다음 해인 2010년 2월이 되자 조금씩 결과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랭킹이 높은 몇몇 대학에서 불합격의 이메일이 오기 시작했다. 유학을 준비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때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기 무섭게 메일을 확인해 보고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메일을 확인해 보는 일이 아주 빈번했다. 본인의 경우에는 벌써 2번의 유학 실패를 겪었기에 더욱 간절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이 시간을 보냈다.

2월 8일에 예일 대학교에서 “Yale University Graduate School Application Decision”이라는 제목으로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만일 합격했다면 분명히 Congratulation이라는 제목으로 도착했을 건데 이렇게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확인하게 하고 또 2월 8일은 합격 통보를 받기에는 좀 빠른 시간인 것 같아서 별 기대 없이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확인했다.

Dear Mr. Lee:

We are pleased to inform you that you have been selected for admission as a full-time student in the Master of Science program in Department of Computer Science beginning with the fall term of the 2010-2011 academic year…(중략)

순간 머리 속이 멍해졌다. 그렇게 기다리던 합격 소식이었는데 또 불합격 했겠지 생각하면서 기대 없이 로긴했는데 갑자기 합격된 것을 확인하니 마음이 얼떨떨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혹시나 싶어서 예일의 Computer Science학과에 메일을 다시 보내 합격 된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집에 다음과 같은 Admission Letter가 온 것을 보고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yale_admission_letter_2010

27개의 대학원에 지원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한 군데만 연락이 와도 성공한 것이었다. 아무리 많은 대학원에 지원을 해도 합격해서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군데뿐이다. 그런데 전산학과에서 첫번째로 합격 소식을 들은 곳이 아이비리그의 명문 학교인 예일(Yale)대학교였다. 나중에 예일의 학생 서비스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던 Linda에게 그 해 CS 석박사 프로그램의 경쟁률이 어땠는지 물어보니 280명이 지원해서 19명이 전산학 석사 입학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경쟁률이 14.7:1이었는데 그 중 합격한 한 명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 지금도 너무나 감사하다.

그 시점을 시작으로 하나씩 어드미션 소식과 리젝 소식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Computer Science 전공 석사로 최종 합격한 곳은 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 Johns Hopkins University, UC San Diego, UC Irvine, UC Santa Barbara이었고 비즈니스 스쿨에서는 MIS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University of Arizona의 Eller 비즈니스 스쿨에서 합격 허가를 받았다.

보통 미국에서는 4월 15일까지 입학 허가를 준 대학교에 대부분 자신이 다닐지 안 다닐지를 모두 알려주게 된다. 어드미션을 여러 군데서 받았다면 최종 자신이 다닐 학교를 고르고 그 학교에는 자신이 다니겠다는 의사 표현을 이메일 혹은 서류를 보내서 밝혀야 된다.

나의 경우에는 제일 고민했던 것이 미시간 주립대(University of Michigan at Ann Arbor)와 예일(Yale)이었다. 예일대의 경우는 아이비리그의 가장 명문대 중의 하나였고 학생 수가 적어서 소수 정예의 수업을 받을 수 있으며 학교 이름으로 인해 취업 시장에서도 강점을 가지리라고 생각했다. 미시간 주립대는 합격한 학교들의 전산학과 중에서 US News학과 랭킹에서는 최고의 학교였고 엔지니어링이 특히나 강한 학교로 유명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예일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학과가 상대적으로 작고 학생수가 적지만 한편으로는 소수 정예로 수업을 받고 교수님과 교류가 좀 더 많은 교류를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아이비리그 최고의 석학들로부터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취업 시장에서 예일이라는 이름이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했다.

(실제 미국 사람들에게 예일을 나왔다고 하면 대부분이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지금 살고 있는 오스틴에서 아이비리그 졸업생들을 거의 보기 힘든 이유도 있을 것이다. 델에서 새로 바뀐 팀의 매니저와의 첫번째 일대일 면담에서 예일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아주 놀란 표정을 보이면서 되물어 보곤 했었다. 인지도가 있는 학교에서 공부했다면 취업 시장에 훨씬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 유학기 (3) – 애리조나에서 다시 만나 본 미국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고 GRE와 GMAT공부에 전념하고 원서 준비를 하던 찰나 외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외삼촌은 이미 아들이 조기 유학을 가서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유학과 관련된 여러 상황에 밝으셨고 내가 유학에 두 번이나 실패한 것을 알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래서 통화를 하면서 미국에 몇 개월동안 어학 연수라도 하면서 영어를 배우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도 어학 연수같은 것을 가고 싶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기도 했었고 나중에 미국 대학원 유학을 가려고 하는데 굳이 어학 연수가 필요할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비용도 문제였다. 학교 다니는 동안은 과외를 통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었는데 비싼 어학 연수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지도 문제였다.

외삼촌은 내 어머니께 얘기해서 나를 몇 개월이라도 어학 연수를 다녀올 수 있도록 지원해 주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보다 미국을 실제 경험하고 거기서 유학을 준비하면 좀 더 낫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나도 2개월 정도를 UC 버클리에 있으면서 공부하기는 했지만 미국 문화와 그 곳 사람들을 좀 더 경험하고 싶었고 거기서 유학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몇 주간 고민하다가 내가 입학하고 싶은 대학원이 있는 학교의 어학 센터를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렇게 결정한 학교가 애리조나의 투산(Tucson)이라는 도시에 있는 애리조나 대학교(University of Arizona)였다. 사실 어학 연수의 목적보다도 내가 이 학교의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 교수님을 만나고 입학 관련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 더 컸었다. 서울대 경영대에서 본인의 지도 교수님이셨던 박진수 교수님께서 사실 이 학교의 비즈니스 스쿨, 엘러(Eller) 비즈니스 스쿨에서 박사를 받으셨다. 한국 사람들은 애리조나 대학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내가 공부하려는 분야였던 MIS(Management Information System, 경영정보시스템) 분야에서는 미국에서 탑 5 안에 드는 좋은 대학원이었다. 주립 대학이었기 때문에 어학 센터의 어학 연수 비용도 다른 학교에 비해서 훨씬 저렴했고 생활비도 적게 들었다.

2009년 6월에 어학 연수를 위해서 애리조나의 투산이라는 도시에 다시 오게 되었다. 투산은 남부 애리조나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애리조나 주 전체에서는 피닉스(Phoenix)에 이어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도시의 이름을 딴 현대자동차의 “투싼”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애리조나에 도착할 때 비행기에서 보니 도시가 완전 황토색의 사막에 군데 군데 선인장이 있는 삭막한 도시처럼 보였다. 6월에 도착했으니 한여름에 가장 더운 날씨에 사막 도시로 온 것이다. 다행히 홈스테이를 신청해서 같이 살게 된 미국인 할머니가 나와주셔서 공항에서 집으로 쉽게 올 수 있었다. 긴 여행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은 집에서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기로 했다.

같이 살게 된 미국 할머니 캐롤린(Carolyn)은 군대에서도 근무하시고 나중에는 투산에서 경찰로 일하시다가 지금은 은퇴하신 분이었다. 할머니는 몇 년동안 애리조나 대학에 어학 연수를 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홈스테이를 제공하고 계셨다. 홈스테이를 하는 동안은 방 하나에서 생활하고 아침은 시리얼, 아니면 토스트 같은 것을 먹고 학교에 가고 점심은 학교에서 해결하고 저녁만 할머니께서 해 줄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저녁에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할머니와 같이 식사를 하고 대화를 했다. 일대일의 대화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가족 같았기 때문에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나를 가족/친지 모임 같은 곳에 많이 데리고 가려고 하셨기 때문에 다른 여러 미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몇 일을 쉬고 애리조나 대학교의 CESL(Center for English as a Second Language)에 등록을 해서 어학 연수를 시작했다. 어학 연수는 너무 평이했다. 사실 어학 연수 온 학생들의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았고 많은 학생들이 공부에 뜻이 있다기 보다는 미국에서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재미있게 놀다가 다시 자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처럼 열심히 준비하는 학생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PBT(Paper Based TOEFL)기준으로 580점만 맞으면 아리조나 대학교에 조건부로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에 토플 점수만 높이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신기했던 것은 아랍 학생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장학금을 받고 온 친구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사막 기후가 사우디 아라비아와 비슷하고 입학이 다른 대학교보다 수월해서 많이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라마단 기간에는 복도에서도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미국 MBA 준비도 하고 미국 경영대 박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GMAT, GRE, TOEFL 점수를 다 어느 정도 받아 놓은 나로서는 어학 연수는 식은 죽 먹기였다. 사실 다 아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시험을 쳐도 수준이 아주 낮았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도 이제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아무튼 나의 목표는 어학 연수가 아니라 애리조나 대학의 Eller 경영대의 교수님을 만나뵙고 입학처장을 만나보는 것이었다. 애리조나 대학교의 MIS석사 프로그램을 들어가고 나중에는 박사 과정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교수님을 알아놓고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아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리조나에서 어학 연수를 하는 동안 Eller 대학원의 수업들도 청강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의 데이터베이스 관련 수업을 교수님의 허락을 받고 청강하기 시작했고 그 수업을 통해서 Eller 경영대에서 박사 과정을 하는 분을 만나기도 했었다. 그 분과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여러 조언도 듣고 내 진로 상담을 하기도 했다. 또한 실제 Eller 경영대의 곳곳을 둘러보면서 앞으로 내가 여기서 대학원 생활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애리조나의 6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다. 어학 연수를 모두 올 A를 받았고 마지막 졸업 때는 가장 많은 상을 받기도 했었다. 토플과 GMAT을 다시 보고 미국 대학원 유학을 다시 준비했다. 가고 싶은 대학교 리스트를 뽑고 에세이를 다시 썼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교정을 받기도 했다. 잠을 줄이면서 공부했고 놀러 가고 싶은 것도 다 포기하고 주말에는 공부하고 원서 쓰기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