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안(Rivian), 실리콘밸리, 그리고 IPO

한동안 글과 블로그에 대해서 잊고 살았다. 너무 바쁘게 살기도 했고 세 아이의 아빠가 되어서 가정을 돌보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따로 다른 것을 해 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그 사이에 코로나라는 팬데믹이 터졌고 마스크 안 쓰기로 유명한 텍사스에서 혼란속에서 거의 2년간 집에서 은둔 생활을 했어야 했으며 혼란을 틈타 이직을 하고 지금은 실리콘밸리의 산호세라는 도시로 이사와서 새로운 삶에 안착하고 있다.

지날 달에 세금 보고를 끝내고 조금 여유가 생겨 3년 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금씩 정리해 보려고 한다. 글로 남기는 것도 생각의 정리가 되고 내 자신에게도 의미가 생기고 또 앞으로 미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생활, 실리콘 밸리, 그리고 여기에서의 IPO가 궁금한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는 바이다.

우선 시계를 3년 전으로 돌려 어떤 일들이 있어났는지 하나씩 설명해보고자 한다.

2020년에 나는 Kind Health라는 온라인 보험회사에서 백엔드 엔지니어로서 Node.js서버를 설계하고 REST/GraphQL 인터페이스를 만들며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셋째 아이를 낳고 가족이 어느 정도 안정된 다음에 다니기 시작한 스타트업 회사였는데 오스틴이라는 도시에 걸맞는 힙한 회사였다. 회사는 기찻길 바로 옆에 있는 창고 건물에 있지만 내부는 온갖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도배되어 있고 회사에서는 사원들을 위해서 탁구대, 네스프레소 커피, 전기 오토바이 등 괜찮은 편의시설들을 많이 제공했었다.

[KindHealth 회사 소개 영상 - 1:17에 본인이 잠깐등장한다]

회사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보험 상품을 중개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나는 서버 전담을 하며 클라우드 서비스와 데이터베이스 연계를 중심으로 개발을 했었다. 중점으로 했던 프로젝트로는 구글 Firebase에서 AWS의 Cognito로 인증 관련 클라우드 서비스 마이그레이션을 진행했었고 데이터베이스를 Mongo DB에서 AWS의 RDS라고 Postgres를 쓰는 RDBMS로 전환을 담당했다. 꽤 오랜 시간의 준비끝에 성공적으로 마이그레이션을 진행했었고 큰 회사는 아니였기 때문에 백엔드 서버 관련해서는 본인이 거의 전담해서 개발을 담당하고 있었다.

2020년 3월쯤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부터 코로나가 급속하게 퍼지면서 회사 오피스에서 모여서 일하는 것이 금지되고 집에서 완전 원격모드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전에 교통 체증이 있는 시간을 피해 오전 11시에서 오후 3시 사이는 회사 오피스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집에서 원격으로 접속해 일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집에서 일하게 된 것이었다.

팬데믹을 맞으면서 생긴 새로운 변화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 인터뷰 기회가 급격하게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최종 인터뷰가 온사이트 인터뷰라고 직접 인터뷰를 보는 회사의 건물로 가서 팀원들을 만나보고 인터뷰를 했었다. 폰 인터뷰를 통과하고 온사이트 인터뷰를 하게 되면 해당 회사에서 비행기표, 렌트 카, 호텔, 식사비 등을 모두 제공하는 것이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테크회사에서는 기본 제공 옵션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직접 대면이 힘들어지게 되자 모든 인터뷰를 원격으로 전환하게 되어 최종 인터뷰를 보는 것이 회사 입장에서도 그리고 인터뷰를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시간적으로 비용적으로 큰 부담이 줄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본 회사에 합격을 하더라도 그 때는 다 원격으로 일할 때라서 굳이 이사를 급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낮아진 인터뷰의 기회 비용과 원격으로 일하는 것의 장점으로 인해 많은 리쿠루터들로부터 메일을 받게 되었다. 나도 그 때 회사에서 일한지 1년 3개월이 지나고 있어서 다른 커리어 성장 기회를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되었다.

미국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게 되면 대부분이 링크드인(LinkedIn)에 자신의 프로필을 올려놓게 된다. 이 프로필을 통해 리쿠루터들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다. 자신의 고객사에 좋은 기회가 있는데 관심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부터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라면 내부 리쿠르터가 있어 그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오기도 한다. 본인이 지금 일하는 리비안의 경우도 내부 리쿠르터가 내 링크드인 프로필을 보고 연락을 하게 된 경우였다.

리비안에 지원할 즈음에는 여러 회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여러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중에 최종 오퍼를 받은 곳은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Remedy라는 헬스케어 회사와 리비안이었다. 사실 Remedy에서 진행한 최종 인터뷰를 잘 끝내고 괜찮은 피드백을 받았었다. 여러 인터뷰에 지쳐 있던지라 리비안과의 최종 인터뷰는 취소할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Remedy에 최종 오퍼를 받기 전에 요청했던 Employee Handbook이 HR관련한 사람이 휴가를 가 있는 바람에 딜레이되게 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비안과의 최종 인터뷰는 스케쥴 된대로 보게 되었다.

리비안 인터뷰는 코딩 인터뷰는 상당히 만족스럽게 봤지만 시스템 디자인 인터뷰에서 내가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조금 애매하기도 했다. 그러던중 Remedy로부터 괜찮은 조건의 잡 오퍼를 받게 되었고 결국 며칠 뒤에 오퍼 레터에 사인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리비안으로부터 최종 합격을 했다는 연락을 듣게 되었고 리쿠루터로부터 확인한 정보로는 Remedy보다 타이틀과 여러 조건에서 훨씬 좋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결국 와이프와 급하게 상의를 하고 여러 조건을 고려해 실리콘밸리로 가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미안하지만 이미 사인한 잡 오퍼를 Decline하겠다는 비즈니스 메일을 Remedy에 보내고 계속 연락하고 있던 VP of Engineering이었던 분께도 자세하게 나의 상황을 정하고 정중히 사과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리비안은 충분한 펀딩을 기반으로 실리콘밸리에서 공격적으로 많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채용하게 되었고 내가 속한 팀도 정말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후 1년 반 만에 기업공개(IPO)도 하게 되었고 상장 첫날 100조의 시가 총액을 기록하게 된다. (미국 증권거래소 역사상 6번째로 큰 규모, 2014년 이후로는 최대 규모) 반면에 Remedy는 사업에 잘 풀리지 않았는지 나를 채용했던 임원도 1년 만에 회사를 나간 것을 보았고 2020년도에는 82명 정도를 정리해고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참 재밌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다. 그 때 만일 처음 오퍼를 받은 회사의 HR 사람이 휴가를 안 갔더라면 오퍼 레터에 사인을 해서 리비안 면접을 포기하고 그 회사에 갔을 것인데 그러면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지금은 많이 유명해졌지만 그 당시 리쿠루터로부터 연락을 받을 때는 리비안이라는 회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차에 그닥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전기차라고 하면 테슬라밖에 몰랐는데 리비안이라는 회사에 대해서 듣게 되고 그 회사에 관련해서 리서치를 하기 시작했다.

리비안은 전기차 스타트업이라고 하지만 사실 2009년도에 설립되었고 2022년 3월을 기준으로 직원만 11500명 정도 달하는 대기업이다. CEO Robert “RJ” Scaringe(회사에서는 RJ라고 부른다)는 어릴 때부터 전기차에 대한 꿈을 가지고 MIT 기계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다음에 이 전기차 업체를 창업하게 된다. 처음에는 스포츠카를 만들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전기차 트럭(R1T)과 SUV(R1S)에 포커스를 맞춰서 전기차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게 되고 현재는 일리노이스의 노말(Normal)에 있는 공장에서 전기차를 생산하고 있다.

본인은 사실 차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미국 생활에서 차는 필수인만큼 운전도 많이 하고 일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력셔리하고 기능이 뛰어나고 예쁜 차를 사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에게는 차라는 것은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고장없고 가족이 필요한 일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충분한 존재인 것이다. 거기에 애착을 느끼거나 정말 예쁘고 좋은 차를 사야 된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런데 리비안에 들어가게 된 것은 웹서버 분야에서 내가 이전 회사에서 하던 일들을 GraphQL 서버 분야를Enterprise Level에서 시도를 하고 있었고 실리콘밸리의 중심이고 스탠포드 대학이 위치한 Palo Alto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실리콘밸리라서 연봉도 상당히 괜찮았고 기존의 오스틴의 회사들과 비교해서 회사에서 주는 주식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물론 현재 이사 온 지금은 비싼 렌트비와 캘리포니아의 주세금 때문에 실제 오스틴에 살 때보다 조금 더 쪼달리게 사는 것은 있다). 아무튼 그 당시에는 리비안을 선택하는 것이 내 인생과 내 가족을 위해서는 더 좋은 선택을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결정했었다.

그리고 당시 코로나가 유행하고 있던 즈음이라 하루에 몇천명이 코로나로 인해 죽는 기사를 계속 보던 나는 가족과 집에서 거의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텍사스는 공화당 중심의 주로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마스크를 거의 쓰지 않았다. 물론 가게나 몰에 갈때는 규칙이 있어서 마스크를 써야 되지만 일상적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는 마스크를 쓴 사람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백인들이 중심인 동네에서 거의 유일한 동양인 가족이었는데 이웃들이 대부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이 곳에 다른 친척들이 없던 나와 와이프는 우리가 아프면 아이들을 돌볼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외부 사람들과도 거의 접촉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마스크를 사수하고 다니는 우리 가족을 동네 사람들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코로나가 번지건 말건 그 사람들은 그 전의 일상과 같이 밖에 나와서 같이 얘기하고 마스크 없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은 그 사람들을 별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과 같이 얘기도 하고 가끔 왕래도 하고 지냈는데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마스크를 거의 쓰지 않던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밖이 어떤 상황인지도 잘 모르는데 하루 종일 거의 집에서만 지내고 밖에 나가는 것을 통제하는 아빠가 잘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근무하게 되어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만 한창 밖에서 뛰어놀 나이인 아이들이 놀이터도 잘 가지 못해서 답답해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곤란을 겪기도 했다.

리비안에 합류한 뒤 거의 1년 가까이를 원격으로 텍사스에서 실리콘밸리에 있는 사람들과 일을 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조금씩 종식되는 기미를 보이자 회사에서는 팔로알토에 있는 사무실로 2021년 9월 30일까지 우리 팀의 소프트웨어 인력들이 모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제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야 될 때라고 느끼고 조금씩 준비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타주로 이사를 가는 것는 절대 쉽지 않다. 새로운 도시에서 시작을 해야 되기 때문에 집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주의 새로운 규칙과 제도들을 배워야 하며 이사와서는 필요한 커넥션들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텍사스에서는 10년을 살아서 시기마다 어떤 일들이 필요한지 자세히 잘 알았는데 캘리포니아에 와서는 처음 해 보는 자동차 매연 검사와 DMV에서 자동차 등록(텍사스보다 엄청 비싸다). 애들 학교를 등록하려고 서류를 준비해야 되고 그 서류를 준비하다보면 애들 소아과의사로부터 검사를 받고 병원으로부터 서류를 받아야 하는데 좋은 의사를 찾는 것부터 병원이 회사에서 준 의료보험으로 커버가 되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을 모두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동네의 HOA(Homeowner’s Association)는 어떤 규칙이 있고, 야드의 물은 어떤 날에 줘야 하고 쓰레기는 분류를 어떻게 하고 어떤 날에 내놔야 하는지 등등 정말 많은 사소한 것들을 다 배워야 한다.

이사 비용도 상당히 비싸다. 본인은 어떻게든 비용을 줄이려고 여러 방안을 간구해보다가 컨테이너를 집 앞에 갖다놓고 짐을 다 넣어놓으면 컨테이너를 옮겨주는 PODS같은 서비스를 처음에 사용하려고 했는데 컨테이너를 갖다놓는 당일에 기사가 집 앞에 나무가지 때문에 컨테이너를 못 설치한다고 해서 부랴부랴 며칠만에 이사 업체를 구해서 이사를 했는데 이사 비용만 12,500불 정도가 들었다. 거기에다 차 2대를 캘리포니아로 보내고 비행기값, 차 렌트비까지 합치면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었는데 다행히 처음에 리비안에 입사할 때 받은 Relocation Package로 다 커버가 되어서 본인이 실제 낸 비용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산호세로 온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간다. 팔로알토에 있는 리비안 오피스에서 근무하려고 온 이사지만 이사 온 다음에 코로나 델타변이가 퍼져서 다시 오피스에서 근무하는 것은 물 건너가게 되었다. 회사에 근무한지 거의 1년 8개월이 넘었지만 회사 오피스에 간 것은 지금까지 2번 밖에 없다. 그래도 원격으로 근무하면서 회사의 GraphQL 서버를 만들고 production 레벨의 서버까지 deploy하고 현재 전기차를 사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있으니 원격으로도 일은 된다는 것을 증명해 낸 셈이다.

실리콘밸리에 온지 몇 달 되지 않아서 여기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면서도 겪기 힘들다는 내 회사의 IPO(기업공개)를 경험하게 되었다. 사실 IPO에 대한 얘기는 리비안에서 근무를 하면서도 몇 번 나왔었지만 이렇게 빨리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리비안에 들어갈 때 주식을 받는 것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니 당연히 기대한 것이었지만 IPO를 기대하면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리비안은 2021년 11월 10일에 한 주 78달러에 기업 공개를 해서 거의 $12B의 자금을 모집했다. 그 당시 회사의 가치가 $66.5B정도 였으며 그 가격이 초반에는 $106.75까지 올라갔으며 한 때는 $170을 넘기도 했었다. 지금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30불 초반을 달리고 있지만 그 당시는 시장 가치가 기존 자동차 회사인 포드와 GM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IPO 초창기에는 주식이 계속 오르고 온갖 언론들이 보도가 줄을 이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주식 가격을 확인하고 신문 기사를 찾아봤지만 현재는 그냥 무덤덤해져서 가끔 회사 주식이 어떤지 찾아보기만 한다.

지금은 실리콘밸리에 산지 거의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살면서 느끼는 몇가지 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날씨가 정말 좋다. : 밤에는 시원하고 낮에는 온화한 날씨가 계속 되고 비가 내리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비로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야외 활동을 하기에 최적의 날씨이다. 텍사스에서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야외 활동을 많이 하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산책과 운동을 할 기회가 많다.
  • 모기가 거의 없다. : 캘리포니아 지역마다 틀릴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모기에 물린 적이 없었다. 큰 아이가 모기에 알러지가 있어서 모기가 많은 오스틴의 우리 동네에서는 저녁 가까이 되면 잘 나가질 않았다. 하지만 여기 와서는 모기에 물릴 걱정이 거의 없어졌다.
  • 집이 작다. : 텍사스는 뭐든 큼직큼직하고 땅이 넓어서 집도 큰 집에 살 수가 있는데 여기서는 집 값이 비싸고 집이 거의 대부분 오래되고 작다. 텍사스에 살던 집의 크기가 2700 sqft정도 였는데 지금 캘리포니아에서는 그 반도 안되는 1200 sqft 정도에서 살고 있다.
  • 사람들이 운전을 험하게 한다. : 아시아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텍사스보다 사람들이 운전을 험하게 하고 끼어들기를 잘 하는 것 같다.
  • 비싸다. : 다른 것은 생각보다 비싸다고 생각을 못하는데 집 값과 렌트비가 다른 지역에서는 상상을 못할 정도로 비싸다. 사실 집만 있고 렌트비 걱정만 없으면 살만한 것 같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모든 것이 조금 더 비싸기는 한데 식료품이나 생필품이 몇 배 가격으로 비싼 것은 아니다. 다만 음식점의 메뉴는 오스틴에 비하면 1.5배에서 2배 정도인 느낌은 있다.

새로운 직장을 따라서 실리콘밸리로 이사를 와서 아직도 적응을 하고 있는 중이지만 가끔 뭔가를 사러 돌아다니면 세계적인 회사들이 즐비하게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운틴뷰에 구글 본사와 쿠퍼티노에 있는 애플, 그리고 아이들 체육관에 데려다주려고 Los Gatos에 가다보면 넥플릭스 본사를 지나가게 된다. 이런 세계적인 회사들이 가득한 이 실리콘밸리에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 내가 성장할 기회도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비싼 물가와 텍사스에 비해서 녹록치 않은 주거 환경의 제약이 있지만 충분히 그것을 뛰어넘을 가치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취업기 (4) – Dell에서의 4년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델에서의 직장 생활을 시작했으니 지금 이 글을 쓰기 시작한 2015년 10월은 델에서 미국 직장 생활을 시작한지 4년이 지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처음 델에서의 미국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같은 팀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회의를 한번 하고 나면 한참 주눅이 들곤 했다. 1시간의 회의 동안 팀의 여러 상황들과 프리젠테이션을 듣고 마지막에 Round Table이라고 이번 주에 어떤 일을 했는지 모든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싫었다. 20명 가까이 되는 팀원들 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혹시나 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혹시나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델에서는 2주에 한번씩 매니저와 일대일로 대화를 하는 One-on-one 미팅이 있다. 즉 직장의 보스와 2주에 한번씩 어떤 주제든 30분 정도 시간을 정해서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 시간에 현재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토론을 할 수도 있고 일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으며 다른 팀원과 마찰이 있거나 팀에 요구 사항이 있으면 전달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일과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매니저의 의견을 물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이 너무나도 부담이 되었다. 나의 나의 첫 매니저와의 One-on-one은 아침 8시였는데 아침 잠이 많은 나로서는 아침 8시에 회사에서 보스를 만나는 것도 힘들었지만 30분 동안 영어로 프리토킹을 한다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보스이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그래서 항상 내 수첩에는 말할 주제를 미리 준비해 놓고 그 주제 안에서 보스와 One-on-one 미팅을 가졌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들 그리고 같이 토론하고 싶은 주제들을 가지고 한참을 같이 얘기하다 보면 30분은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첫 해는 매니저가 목표를 정해주는데 그 중에 하나는 팀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UEFI Shell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발표 준비를 했는데 몇 주 동안 발표 자료를 만든다고 많이 고생했던 것 같다. 발표날도 너무 긴장을 해서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아침 8시 미팅에 참석했다. 다행히 발표는 순조롭게 잘 끝났지만 긴장이 한꺼번에 풀어지면서 몸이 너무 힘들어서 오후에는 집에 돌아가서 쉬어야만 했다. 미국 회사에서의 한 첫 발표라서 정말 많이 긴장했던 것 같다.

그렇게 걱정과 긴장으로 가득했던 델에서의 1년이 지나고 조금씩 미국 직장과 생활에 적응하면서 모든 것이 조금씩 편해져갔다. 매일 같이 밥을 먹는 팀 동료들과 이제는 거리낌없이 지냈고 매 주 가지는 전체 미팅과 2주마다 가지는 매니저와의 일대일 미팅도 편해졌다.

첫 해는 바이오스 일을 하면서 늦게 가고 밤을 새는 날도 있었고 주말에도 가끔 나가는 날이 있었다. 그런 것을 회사에서 시킨 것이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일하는 첫 해에 좋은 성과를 내고 싶었고 나를 믿어주는 팀 동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팀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을 어기고 싶지 않아 일정 내에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다했다.

둘째 해부터는 일에 많이 익숙해지고 어떻게 일정을 조절해야 될지도 어느 정도 가늠이 되어 늦게 일하거나 주말에 일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리고 이 때부터는 팀에서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집에서 일주일에 이틀 동안 일하는 옵션이 생겨 월요일과 목요일은 집에서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하면서 많은 혜택을 받았던 것이 임신한 아내를 많이 도와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부모님들이 모두 한국에 계셔 임신과 출산을 아무 도움 없이 우리 부부가 챙길 수 밖에 없었는데 내가 집에서 일하는 동안 병원도 갔다 올 수 있었고 여러 필요한 것들을 아내에게 챙겨 줄 수 있었다.

델에서 4년 동안 일하는 동안 보고 느낀 것은 다음과 같다.

  1. 델에서 정말 오랜 기간동안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3년 정도 일하면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라고 권하는데 델에서는 10년 15년 정도 일한 사람들을 정말 흔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는 텍사스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다른 주로 잘 가지 않으려는 특성이기도 했고 오스틴에서는 델이 가장 좋은 직장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델에서 일하면 알게 되겠지만 일하는 기간이 길수록 여러 보너스 혜택들이 더 많아져 쉽게 이 직장을 떠나기 힘든 까닭도 있는 것 같다.

  2. 나이가 많이 든 엔지니어도 쉽게 볼 수 있다.
    언듯 보기만 해도 나이가 꽤 든 백발의 할아버지가 분명한데도 델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것을 꽤 쉽게 볼 수 있다. 예전에 알던 서버 바이오스 팀의 한 할아버지는 70이 넘은 나이에 은퇴하고 다른 주에 집을 사서 간다고 환송 파티를 하였다. 그리고 지금 옆 팀에서도 70이 넘은 엔지니어 분이 금년(2015)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고 플로리다로 간다고 하였다. 한국은 그 나이에는 엔지니어로 머물러 있기가 힘든데 미국은 엔지니어로서 계속 그 경력을 키워 나갈 수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3. 미국의 임원들은 정말 말을 잘한다.
    분기마다 All-Hands 미팅이라고 사업 전반의 상황과 산업 동향, 그리고 전략 등을 설명하는 전체 미팅을 임원들이 이끈다. 프리젠테이션 능력도 능력이지만 수백명의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발표를 잘 이끌어가는 능력,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여러 질문을 받고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해 가는 것을 보면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 임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가족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공감한다.
    예전에 일이 너무 많아서 회사에서 밤을 새고 주말에도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서 매니저와 얘기를 했더니 추가로 일한 만큼 며칠 동안 집에서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Always family first”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연말에 나에게 피드백이 들어왔는데 Stan이 늦게 일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5. 나이가 어리든 많든 서로 존중하고 직급에 따른 권위주의가 없다.
    :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중소기업에서 병역특례로 일을 시작했는데 한 미팅에서 처음 그 회사의 사장님을 처음 만나서 정말 떨렸던 기억이 있다. 단순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떨리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심장이 떨리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분들과의 만남은 항상 부담감이 있다.
    미국에서도 높은 분들과의 만남은 부담감이 있다. 하지만 여기는 한국에서 보던 것처럼 권위주의가 없고 서로 존중해 주는 입장에서 만나기 때문에 좀 더 마음이 편하다. 예전에 델의 임원분들과 일대일로 만난 경우가 있었는데 부담은 좀 있었지만 미리 질문과 이야기할 거리를 준비해 간 덕에 별로 떨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6. 술•담배를 멀리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직장인에게는 술과 담배를 멀리 하기가 힘들다. 회식 때는 거의 당연지사로 술이 동반되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술 자리게 가게 되는 것이 내가 경험한 한국의 직장 생활이었다. 그리고 특히 남자들은 같이 담배를 피우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나로서는 이런 기회에서 조금 소외되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미국 회사에 오고 나서 술을 마시는 강압적인 분위기는 전혀 경험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개인의 취향과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 탓일 것이다. 가끔 회사에서 파티나 해피아워(Happy Hour)를 하게 된다면 가볍게 맥주 한잔이나 와인 한잔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이것도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소프트 드링크(콜라, 사이다 등)을 마셔도 상관없다.

  7. 자연스럽게 가정적이 된다
    미국 회사는 대부분 회식이라는 것이 없다. 5시에 퇴근하면 같이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시러 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5시에 일이 끝나면 집에 가서 가족들과 보내지 회사 동료들과 어울리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없다고 봐도 된다.
    5시에 회사가 끝나고 본인의 경우는 15분 정도 운전해서 집에 도착하면 그 다음 시간은 당연히 가족들과 보내게 된다. 같이 식사 준비도 하고 아이도 돌보면서 온전히 저녁 시간을 가족과 보내게 되니 사람이 가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 일할 때 매일 저녁을 회사에서 먹고 야근을 하다가 10-11시쯤에 들어왔었는데 만일 여기서도 그렇게 생활을 했다면 가족들과 많은 것을 공유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유학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Work & Life Balance 때문이었다. 어차피 한국에 계속 살게 된다면 회사 생활을 하는 한 야근, 술, 회식을 피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환경을 바꿀 수 없는 바에는 다른 환경으로 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부조리하고 강압적인 회사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고 언제까지나 그 변화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오래 걸리고 그렇다고 회사에서 작은 존재인 내가 그 문화를 변화시키는 선동자가 되기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었다. 만일 그런 문화가 없는 회사가 있고 내가 그 회사에서 일할 수 있다는 내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결심한 것이 미국 취업이 상당히 수월하다고 알려진 Computer Science를 공부해서 미국 취업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준비를 했고 미국 대학원 유학을 온 다음에 4년 동안 델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해 온 것이다.

그럼 내 삶은 어떻게 변했는지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9-5 생활이 가능하다.
  •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할 일이 전혀 없다.
  • 주위 사람들이 피는 담배 냄새 때문에 짜증 날 일이 없다. (회식, 사무실 밖 등)
  • 선후배 문화, 그리고 연장자 때문에 짜증 날 일이 없다. 여기는 다 First Name을 부르고 평등한 관계이다. (다만 매니저는 제외다. 내가 일의 진행 상황을 보고해야 하고 나중에는 그로부터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매니저라도 HR에 고발할 수 있다)
  • 부당한 일을 당한 기억이 없다. 부당한 일을 당하면 나는 언제나 lawsuit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가끔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싶기도 하다. 그걸로 lawsuit하고 보상금으로 빨리 은퇴하고 싶다.
  • 일주일에 이틀은 집에서 일한다. 와이프가 내가 집에서 일하는 날은 너무 좋아한다. 내가 잠깐 잠깐 아이를 봐줄 수 있기 때문이다.
  • 병원 진료, 급한 용무 등 개인적인 용무 및 가족 관련 용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미리 팀원들에게 얘기만 하면 된다.
  • 입사 초기에는 휴가가 2주였으나 올해부터 입사 5년차에 접어들어 이제 휴가는 3주다. 미리 팀원들에게 알려주면 거의 대부분 내가 원할 때 쓸 수 있다.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가 전혀 없다.
  • 회사에서 따로 쉬는 날이 일년에 10일 정도 된다. 크리스마스 주는 완전 다 회사 휴무 날이라서 다 쉴 수 있다. 휴가랑 겹쳐 쓰면 12월은 회사를 안 가도 된다.
  • 일년에 2주 정도 개인적인 사유로 회사를 안가도 된다. (질병, 가족 일, 개인적 사무) 다만 미리 매니저 허락을 받아야 된다.
  • 대학원 석사 1년에 끝내고 회사 입사시 초봉으로 1억 남짓 받았다. (그 당시 환율, 보너스 포함)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 영어 문제는 아직도 있다. 아직 전화 받기가 싫을 때가 많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닐 경우에는 전화를 하지 않는다. 회사 회의에서 누가 농담을 해서 다 웃고 있는데 나는 웃는 척만 하고 있을 때도 있다. 솔직히 왜 웃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 풋볼 얘기나 야구, 농구 얘기가 나오면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나는 농구를 하는 것은 좋아하는데 NBA 선수와 팀을 잘 알지는 못하고 보는 것을 즐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 연봉을 1억을 받아도 실질 사는 수준은 연봉 4천-5천 정도가 아닐까 싶다. 세금을 많이 떼이고, 달마다 나오는 렌트비도 만만치 않다. 차 값 할부도 내야하고 대학원 때 빌린 학비도 6년 더 갚아야 한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이 대부분 느끼는 것이지만 저축하기가 정말로 힘들다. 여기서는 돈 모으기 참 힘들다. 하지만 좋은 것은 생필품과 공산품이 대부분 한국에 있을 때보다 현저하게 싸다는 것이다.
  • 아이 육아를 온전히 나와 와이프가 책임져야 하므로 육아에 있어서 많이 지친다. 여기는 도와줄 부모님도 없기 때문이다.
  • 한국에서 살 때보다 외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미국인들을 많이 사귀어서 지금은 괜찮다.

미국 회사 생활의 여러 장점과 단점을 따져봐도 나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는 것보다 미국 회사 생활을 하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과 더 잘 맞는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이 일을 하는 동안 가족도 잘 챙길 수 있고 여유롭게 생활 할 수 있으며 나를 존중해 주는 회사 사람들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으며 아랫사람 부리듯이 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개개인의 인격이 존중되는 공동체이고 만일 그것을 그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퇴출되게 된다.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개인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서 이길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데 있어 회사를 상대로 한 개인의 외로운 싸움이 되지도 않는다.

세계적인 많은 기업들이 미국에 위치해 있어 취업 사정도 좋으며 특히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면 헤드헌터들로부터 많은 연락을 받을 것이다. LinkedIn이나 Monster.com, Indeed.com 등에 레쥬메를 올려놓는다면 많은 IT기업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을 것이다. 본인도 한번 올려놨는데 헤드헌터들로부터 하도 전화가 많이 와서 요즘은 모르는 번호로 오면 잘 받지 않는다.

미국 생활을 거의 5년 정도 한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미국의 기업은 한국의 회사에 비해서 정말 천국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회사에서 시달렸던 고질적인 문제점이 여기는 없기 때문이다. 우선 술과 담배에 찌든 회사 문화로부터 자유롭게 저녁 시간이 거의 보장되어 가족과의 시간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라면 미국 회사에서의 삶을 만족하게 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미국이라는 나라가 외국인이 와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 엄격한 제약을 가한다는 것이다. 그런 요구 조건을 만족한다고 해도 미국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자국인들과 경쟁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보다 뛰어난 무언가가 없다면 쉽게 달성하기 힘든 목표이다. 또한 만일 일하게 되더라도 신분 문제에서 한동안 자유로울 수가 없고 지금까지 쓰던 언어와 전혀 다른 언어를 쓰며 다른 문화를 마주하고 지내야 하므로 상당한 스트레스 속에서 지내야 한다. 또한 사랑하는 부모님들과 그리운 친구들을 멀리하고 타국 땅에서 지내야 하므로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이걸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미국 유학을 온 다음에 미국 회사에 취업을 하길 권하는 바이다. 생각보다 미국 생활은 녹록지 못하고 하루 하루 많은 어려움과 맞닥뜨리며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국 취업기 (3) – 드디어 미국 대기업 취업 – DELL

델에서 잡 오퍼를 받았으나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처음 취업을 할 때 필요한 OPT카드를 발급받지 못했다. 졸업 즈음에 신청하더라도 발급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이었다. 5월에 졸업하고 6월에 델에서 잡 오퍼를 받았는데 7월 말이 되기까지 깜깜무소식이었다.

7월 말에 한국에서 받은 국제 면허가 만료되기에 졸업하자마자 운전면허를 따려고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 오피스에 가서 운전면허 시험 신청을 했다. 코네티컷에서는 그 시험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8시간의 안전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렌트카를 빌려서 먼 곳에 있는 교육 센터에서 거금 120달러를 내고 교육도 받았다. 그래서 DMV 오피스에 갔는데 그곳의 직원이 나는 운전면허 시험 신청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안전 교육도 받고 증명서도 제출했는데 왜 안 되느냐고 하니 내가 신분이 불분명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때 학교를 졸업했으니 학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취업한 것도 아니니 나의 신분 문제가 붕 떠버린 것이었다.

대학원생일 때는 공부와 취업 준비에 너무 바빠서 미국 운전면허를 볼 생각을 못 했는데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국제 면허증으로 필요하면 렌트카를 빌려 운전해서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제 졸업하고 시간이 나서 운전면허를 보려고 하니 이제 안 된단다. 정말 그때는 눈 앞이 깜깜했다. OPT 카드를 받으려면 뉴헤이븐의 지금 집에서 기다려야 되는데 1년 리스 기간도 만료되어 가고 나중에 국제 운전면허도 만료되면 짐을 어떻게 옮길지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국제 면허가 2011년 7월 30일까지였는데 기다리다가 결국 7월 20일 즈음에 텍사스로 이사하기로 결정을 했다. 원래는 비행기로 우선 텍사스에 가서 필요한 아파트를 찾고 리스 계약을 한 다음에 다시 코네티컷으로 돌아와서 짐을 꾸려서 이사를 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OPT 카드를 기다리느라 시간도 없었고 그렇게 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델에서 잡 오퍼를 준 뒤 이사 비용을 지원해 주었는데 (미국 회사에서는 대부분 새로 직장을 찾고 그 직장이 있는 도시로 이사해야 되면 이사 비용을 지원해 주는 경우가 많다) 받기로 한 비용이 8000불이었다. 처음에는 8000불이 충분해 보였지만 나중에 통장에 들어온 것을 보니 세금을 떼고 5500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사 비용을 알아보니 지금 가지고 있는 가구 모두를 옮기는 것보다 최소한만 옮기고 나중에 그곳에서 다시 사는 것이 훨씬 경제적으로 이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왜 미국 사람들이 이사를 갈 때 Garage Sale이라고 차고에서 자신이 쓰던 물건을 싼 가격에 파는지 알 것 같았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커서 자신을 쓰던 물건을 다 가지고 가게 된다면 짐이 너무 많아지고 거기에 따른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가지고 있던 식탁, 매트리스, 침대, 책장 등의 큰 가구들은 모두 필요한 사람이나 교회에 주고 나머지 짐들을 박스에 싸기 시작했다. Enterprise라는 렌터카 업체에서 1300불을 주고 일주일 정도 미니밴을 빌려서 텍사스로 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뉴헤이븐에 있던 모든 친구들과 환송회를 끝내고 드디어 텍사스로 출발했다. 전날과 그 날 아침까지도 짐을 싸느라 아침 일찍 출발하려던 계획은 수정되고 결국 오후 2시쯤에 출발했다. 구글 맵에서 가는 길과 시간을 다 보니 약 4일 정도 걸리고 하루에 600~800마일 정도만 운전하면 사흘 후에는 텍사스 오스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날은 너무 늦게 출발해서 첫날 밤 숙소였던 Holiday Inn에 도착한 게 새벽 2시 30분 정도였다. 뉴헤이븐에서 너무 늦게 출발했고 아침까지도 짐을 싸느라 너무 힘들었는데 밤늦게까지 운전해서 예약한 숙소까지 도착하는 길이 너무나 멀게만 보였다. 나는 아직 운전도 익숙하지 않은데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하루8~10시간 정도 계속 운전할 수 밖에 없었다. 운전 첫날은 아내도 나도 너무 피곤했는데 새벽 2시 반까지 운전하느라 계속 눈이 감겼고 서로 잠을 깨워가며 겨우 첫날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코네티컷에서 텍사스까지의 여정:
27시간으로 나와 있지만 숙박, 식사, 휴식 등을 합하면 실제로는 거의 4일 정도 걸린다

도시가 바뀌고 주가 바뀔 때마다 변하던 자연 환경이 아직도 정말 기억에 남는다. 커네티컷에서 메리랜드, 버지니아, 켄터키, 테네시, 아칸사스를 거쳐서 드디어 텍사스의 달라스에 도착해서 조금 안도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테네시에 들어서자 갑자기 나무가 울창해지더니 운전하는데 수많은 벌레가 부딪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떤 날은 비가 정말로 엄청나게 와서 고속도로로 가는데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아 결국 운전을 포기하고 근처 교회의 주차장에서 몇 시간동안 비가 좀 약해지기를 기다리다가 간 적도 있었다. 달라스에서는 차가 너무 많고 많은 사람이 난폭하게 운전해서 아주 조심조심하게 운전했었다.

그렇게 4일을 운전해서 델 본사가 위치한 텍사스의 라운드락(Round Rock)이라는 도시에 도착해 근처의 Holiday Inn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도착한 하루는 그래도 좀 편하게 쉬고 다음 날부터 미리 인터넷에서 봤던 아파트들을 하나씩 찾아가서 리스 계약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라운드락의 몇 군데 아파트를 돌아다녔는데 다행히 한 곳이 바로 입주가 가능해서 빨리 계약을 끝내고 짐을 옮겨다 놓기 시작했다.

이제 OPT 카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원래는 받는 주소가 코네티컷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사를 텍사스로 오게 되어 어떻게 할까 하다가 수소문해보니 학교 International Office 주소로 받을 수 있었다. 급하게 OPT 카드 받는 주소를 변경하고 오피스에 OPT카드가 도착하면 텍사스로 나중에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OPT카드가 없으면 취업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이렇게 오피스를 거쳐서 받는 것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그렇게 학교 오피스에 부탁하고 텍사스로 올 수밖에 없었다.

OPT 카드를 기다리는 동안 델에서 면접 때 뵈었던 한 한국분으로부터 입사 준비는 잘 되어가는지 이메일을 받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된 것이 내가 근무하게 될 곳이 라운드락 오피스가 아니라 오스틴 오피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는 면접을 라운드락에서 봤고 그곳이 본사가 있는 곳이니 당연히 거기서 근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틴에 다른 오피스가 존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다시 매니저에게 확인을 해보니 내가 오스틴 오피스에 근무하게 될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앞이 깜깜했다.

새로 구한 아파트가 라운드락에 있었기 때문에 델의 라운드락 오피스로 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5.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여서 자전거를 타고 가면 20분 정도에 갈 거리였고 혹시나 만일 걸어가더라도 1시간 정도만 걸으면 회사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만일 오스틴 오피스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16 km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가면 1시간, 걸어간다면 쉬지 않고 걷는다고 해도 3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되면 출퇴근에 큰 문제가 생긴다. 이제 7월말에 국제 운전면허가 만료되기 때문에 그때는 차를 렌트할 수도 없었고 라운드락은 버스가 다니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한여름의 텍사스에서 1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간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방법을 고민하다가 배터리를 이용해서 갈 수 있는 전기 자전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료 500달러의 거금을 투자해야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래도 이런 옵션이 존재한다는 것만 해도 너무 다행이었다.

OPT 카드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전기 자전거를 가지고 라운드락에서 오스틴에 있는 델 오피스까지 모의 출퇴근을 해보기로 했다. 토요일 아침에 일찍 출발해서 가니 약 1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어서 지도를 다 프린트해서 갔었고 어떤 때는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인도가 없어서 차가 다니는 길에서 자전거를 타느라 고생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어떤 날은 델 오스틴 오피스에서 집으로 오는 길을 잘못 들어서 4시간 정도를 땡볕에서 고생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여러 번 모의 출퇴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배터리가 2개 정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배터리 하나로는 오스틴에 있는 회사로 갈 수는 있지만 중간에 전기 자전거의 배터리가 많이 소모되어 후반부에는 조금 힘들게 가야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온전히 내 힘으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와야만 했었다. 근데 만일 배터리가 두 개라면 좀 더 편하게 왕복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마존에서 전기 자전거 배터리를 하나 더 주문해서 받으니 좀 더 마음이 편안했다.

예전에 연락을 받았던 델에 계신 한국분과 입사 전에 만나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델의 회사 분위기와 입사하기 전에 숙지해야 하는 사항 등 많은 것들을 그분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분이 라운드락에 사셔서 한동안은 라이드를 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너무 감사했다.  

약 2주 정도를 기다리니 학교 오피스로부터 내 OPT 카드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급하게 이메일을 써서 텍사스의 집으로 급행 소포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배송비를 결제하기 위해 신용카드 번호도 같이 보냈다. 다음 날 OPT 카드가 도착하고 드디어 회사에 입사할 준비가 되었다. 정말 꿈만 같았다. 이제는 정말 미국 회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었다. 나의 입사일은 2010년 8월 15일이었다.

첫날은 라운드락 본사로 가서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게 되었다. 원래 라이드를 해 주시기로 한 한국 분이 그 주부터 휴가라서 그 주는 자전거를 타고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날은 점심까지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고 점심 후에는 같이 일하게 될 다른 팀원을 만나서 같이 점심 식사를 하고 오스틴에 있는 오피스로 일하러 가게 되었다. 그 때 만난 팀원은 원래 베트남에서 살았는데 베트남 전쟁 때문에 피난을 다니다가 미국에 망명을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델에서는 15년 넘게 일하고 아이도 3명이 있는 워킹맘이었다. 첫날은 내 컴퓨터 시스템을 준비하고 회사 관련 웹사이트나 랩 액세스 같은 꼭 필요한 사항들을 다 챙겨주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자전거를 세워놓은 라운드락 오피스에 데려다도 주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둘째 날부터는 근처에 사시는 다른 분께서 라이드를 해주신다고 하였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미국 직장을 찾을 때만큼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차가 없고 운전할 수 없으면 미국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해주는 귀한 경험이 되었다. 운전면허를 바쁘다고 미루다가 결국은 신분 문제 때문에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차도 살 수가 없었고 그걸로 회사 출퇴근이 문제가 되면서 정말 복잡한 문제가 되었는데 그 많은 연결된 문제들이 여러 많은 분의 도움으로 조금씩 해결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 오시는 분들에게 운전면허는 어떻게든 빨리 따라고 권유하곤 한다. 정말 그때는 이 문제 때문에 고민도 많이 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 취업기 (2) – 온사이트 인터뷰 –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LSI, 그리고 델(Dell)

예일에서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다시 캠퍼스 리쿠루팅 이벤트를 열었다. 첫 학기 때는 고배를 마셨지만 이번 학기는 꽤 오랫동안 프로그래밍 인터뷰를 준비한 덕분에 학교에 온 면접관의 질문에 모두 답변을 했고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있는 워싱턴 주의 레드몬드(Redmond)라는 도시로 온사이트 인터뷰 초청을 받았다.

학교의 봄방학 때를 맞추어서 온사이트 인터뷰를 보기 위해 새벽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인터뷰 전날은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파티를 주최했었는데 다음날 혹시나 정신이 흐트러질까봐 가지 않았다. 프로그래밍 인터뷰에서 합격 불합격의 많은 부분이 결정이 나기 때문에 알고리즘과 데이터 구조 부분을 정리하고 예상 질문과 답변을 다시 상기하며 인터뷰 전날 밤을 보냈다.

드디어 결전의 날,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인터뷰를 보는 사람들에게 형형색색의 네온 사인으로 내부가 꾸며진 멋진 버스를 보내주었다. 15분 후 본사의 한 건물에 들어가서 한 방에 모여 기다리는데 주위를 보니 인터뷰를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이 긴장한 구석이 완연했다. 인터뷰는 50분씩 4번 보는데 모두 프로그래밍 인터뷰였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개발자 모두 개인 방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각각의 인터뷰 때 면접관이 자기 방에 데려가서 인터뷰를 보곤 했었다.

첫 번째 엔지니어의 방에서는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때까지도 영어가 서툴렀던 나는 질문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번 다시 물어보았다. 질문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름의 데이터 구조를 세우고 내가 생각하는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큰 어필을 준 것 같지는 않았다. 두 번째 엔지니어의 방에서는Linked List안에서 Cycle의 여부를 인지하는 문제를 먼저 제시하고 점점 조건들을 추가해가며 각각Pseudo 코드를 작성할 것을 요구 받았다. 1시간동안 엔지니어와 질문을 주고 받으면서 코드를 화이트 보드에 썼고 마지막에는 “You are correct.”라는 말도 들었다. 조금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방에서는 매니저인 면접관이 종이와 연필 하나를 주더니 자기 요구사항에 맞게 Tree를 만들고 Depth-first search와 Breath-first search에 대한 여러 사항들을 묻더니 자기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는 알고리즘을 구현할 것을 주문했다. 여러 시도를 하고 토론을 하다 보니 또 1시간이 지나서 그 방을 떠나게 되었다. 마지막 방에서는 주어진 검색에 대한 알고리즘을 Pseudo 코드로 제시하고, 그 후에는 내가 작성한 Recursive로 되어 있는 코드를 Iterative 바꾸면서 두 코드에 대한 장단점을 설명할 것을 요구 받았다. 이 부분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부분이라서 답변도 꽤 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모든 인터뷰가 끝났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그 날 인터뷰를 본 사람들은 모두 한 방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직원들이 그 사람을 데리고 사라지게 된다. 내 이름이 불리고 한 여직원이 나를 안내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가다가 “Unfortunately…”를 들었을 때 그 결과를 직감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날 같이 면접을 본 사람은 15명 정도였고, 합격한 사람은 2명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마지막 학기에 열심히 전력투구를 한 덕에 좋은 성적을 받아 예일에서 1년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즈음에 LSI라는 네트워크와 스토리지 관련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아서 2명의 엔지니어와 전화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전화 인터뷰를 괜찮게 보았는지 그 후에 온사이트 인터뷰 초청을 받아서 펜실베니아로 가게 되었다. 5명과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마이크로소프트 때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프로그래밍 문제도 대부분 답변을 했고 편한 마음으로 거의 6시간의 인터뷰를 마쳤다. 하지만 약 3주 후 당시 그 회사에 내부 구조 조정이 생겨 내부 인력을 우선 채용을 하는 바람에 팀 내에서 외부 인력을 더 뽑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매니저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 날 인터뷰를 했던 다른 분으로부터는 팀에서는 나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는데 갑자기 내부 리소스에서 인력을 뽑아야 되었다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다음 도전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인터뷰 요청을 받은 곳이 텍사스에 있는 델(Dell) 컴퓨터였다. 델의 웹사이트를 통해 몇몇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포지션에 지원했었는데 몇 달 후 갑자기 델에서 전화가 와서 바이오스(BIOS) 엔지니어로 면접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학부 때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석사 때 전산학을 공부한 내 이력을 눈여겨본 것이었다. 나는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내 취업 자격을 주는 OPT제도는 졸업 직후 OPT를 시작한지 90일 내로 미국 내에서 취업을 못하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직장을 찾아야 했었다. 델의 엔지니어와 전화 인터뷰를 끝내고 나서 며칠 뒤에 텍사스로 가는 비행기표가 도착했고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텍사스로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 텍사스에 도착하고 라운드락(Round Rock)이라는 도시에 있는 델 본사에서 면접을 보았다. 6시간 동안 6명과 인터뷰를 보았다. 기본적으로 C/C++에 대한 개념 문제부터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프리젠테이션 할 것을 요구 받았다. 컴퓨터의 부팅 과정과 바이오스의 역할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과 더불어 조직에서 여러 상황들에 대처능력을 예측하는 Behavior Questions에 대한 답변도 요구 받았다. 6시간의 긴장된 순간들이 끝나고 호텔에 돌아와 쉬면서 그 날은 정말 오랜만에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3주 후 델의 2개 팀으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첫번째 팀은 델의 서버 바이오스(BIOS)팀이었고 한 팀은 OEM Solutions팀이었다. OEM Solutions 팀이 내가 그 당시 선택한 팀이었다.

연봉 협상을 하고 정식 잡 오퍼 레터가 왔는데 기한이 일주일이었다. 당시 같이 진행하고 있던 구글 인터뷰는 다음 단계가 결정 나려면 6주 정도까지 걸릴 수 있다는 말에 프로세스를 중지하고 델에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텍사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델에서 받은 잡 오퍼 레터 일부

미국 취업기 (1) – 1300개의 입사지원서

내가 미국에 온 것은 미국 직장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직장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유학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고 그 다리를 건너면서 이제는 미국인들과 취업을 위해서 경쟁을 해야만 했다.

2010년 8월에 미국에 건너왔고 그 해 10월부터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미국에 온 지 2달밖에 되지 않았고 영어를 듣고 이해하는 것도 힘든 시절이었는데 직장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 사람과 마주보면서 대화하는 것도 어색하고 힘든데 전화 통화로 미국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영어로 나 자신을 취업 시장에서 잘 포장해서 팔아야 한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다.

미국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취업하기 위해서는 우선 레쥬메(Resume)와 커버레터(Cover Letter)를 준비해야 한다. 레쥬메는 자신의 학업, 경력, 외부 활동 등이 보통 한 두 장에 정리된 이력서로 대부분의 기업이 구직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커버레터는 한국 기업에는 없는 문화인데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고 왜 그 기업에 지원하는지 목적과 포부를 밝히는 문서이다. 이 레쥬메와 커버레터를 준비해서 기업 웹사이트의 구직 페이지나 HR 담당자에게 보내면 그 기업에서 나의 이력에 맞는 일자리가 있는지 검토하게 되고 만일 매칭되는 일자리가 있다면 본인에게 연락이 오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보통 몇 주가 걸리고 오래는 몇 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기업의 HR 담당자에게 연락이 오게 된다면 전화로 보통 15분에서 길게는 1시간 정도의 인터뷰를 하게 된다. 담당할 직무에 대한 설명과 현재 구직 상황 그리고 학업 및 직장 경력에 대한 여러 답변을 하게 되면 다음 인터뷰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일반적으로 다음 인터뷰는 전화상으로 그 회사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 때가 바로 테크니컬 인터뷰(Technical Interview)의 시작이다. 보통 1시간 정도의 시간을 잡고 전화상으로 프로그래밍 전반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되면 구직자는 질문자와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서 생각을 나누게 된다. 그 인터뷰가 끝나면 인터뷰를 진행한 사람은 방금 인터뷰한 구직자에 대해서 피드백을 HR 담당자 혹은 사람을 뽑는 팀의 매니저에게 보내주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받은 사람들이 앞으로 인터뷰를 계속 진행할 지 아니면 거기서 그만둘지 결정한다. 첫번째 인터뷰를 잘 했다면 두번째 전화 인터뷰로 넘어갈 수 있으며 어떤 기업의 경우에는 직접 그 기업을 방문하는 온사이트 인터뷰(Onsite Interview)로 바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제 온사이트 인터뷰에 오게 된다면 미국 직장 구직에서 초기 관문은 넘은 것이다. 이제 실제 그 회사를 보고 그곳에 일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만나서 문제를 풀면서 토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하루에 4명에서 8명까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정말 진땀을 빼게 된다. 그 사람들은 1시간만 만나고 가면 되지만 인터뷰를 하는 구직자의 입장에서는 매시간 다른 사람들이 와서 질문하고 열띤 토론을 하고 가기 때문에 정말 신경이 곤두서는 하루가 된다. 점심을 같이 먹는 사람도 정해져 있고 그것도 인터뷰의 일부이기 때문에 실제 점심도 편하게 먹지는 못한다.

그렇게 온사이트 인터뷰가 끝나면 일부 회사는 바로 인터뷰 결과를 알려주기도 한다(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경우에는 오전에 모든 인터뷰가 끝나고 점심을 먹고 특정 방에 모여 있으면 합격했는지 불합격했는지 바로 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회사는 다른 구직자들과 비교해서 최선의 사람의 뽑기 위해서 몇 주 동안 결과 발표를 미루기도 한다. 이 시간이 지나고 합격 통보를 받으면 이제 연봉 협상을 하는 과정을 거치고 입사 절차를 거치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들이 미국 사람들에게도 부담되는데 영어가 되지 않는 외국인들은 얼마나 힘든 과정이겠는가?

하지만 불가능해 보인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2010년 9월에 학기를 시작했고 2011년 5월에 졸업 예정이니 나에게는 9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든 되게 만들어야 했고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지원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Computer Science에 대한 전공 지식이 많이 없어서 테크니컬 인터뷰를 준비하는 것이 특히나 힘들었던 점이었다. 대학 시절에 전자공학을 전공하면서 데이터구조(Data Structure) 수업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전산학의 핵심 과목인 알고리즘(Algorithm) 수업을 들은 적이 없이 관련 지식을 공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일반 전산과 출신에 비해서 학과 수업에서 여러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해 본 경험도 부족했다. 예일에서 1년 공부를 하면서 전산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아서 예일 학부 수업을 청강하기도 하고 따로 책을 사서 공부하면서 계속 인터뷰를 준비해갔다.

실제 입사 지원서를 넣기 시작한 것은 2010년 10월부터이다. 9월에는 입학과 동시에 수업이 시작되어 대학원 수업을 따라간다고 정신이 없었는데 대학원 동기들이 조금씩 회사에 지원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지금 지원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입사 지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은 보통 졸업 1년 이전부터 입사를 준비하는데 졸업하기 1년 전에 잡 오퍼를 받아 놓으면 훨씬 마음 편하게 졸업을 준비할 수도 있거니와 만일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더라도 1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다른 많은 기업에 입사를 지원해 볼 수 있는 긴 시간이다.

그런데 본인의 경우는 거의 미국에 오자마자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준비해야 했으니 그 부담감이 상당했다. 또한, 주위의 한국 사람들은 따로 직장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박사 과정 학생들 혹은 박사 과정을 준비하는 석사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보를 얻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 시스코에 다니고 있던 한국계 미국분을 만났는데 그 분께서 취업 과정 중에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 형은 어릴 때 미국에 오셨는데 카네기 멜론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시스코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고 계신다. 그 형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어떤 식으로 엔지니어를 뽑는지 그리고 입사 지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본인의 레주메를 봐 주시기도 하시고 여러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회사에 지원할 수 있도록 알아봐주시기도 하셨다. 정말 힘든 시기에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났으니 정말 두고두고 감사할 일인 것 같다.

처음에 잡 서치를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이 깜깜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우선 다음 두 가지로 시작했다(가고자 하는 회사에 지인이 없다면 현재까지도 이 방법이 제일 효과가 있고 제일 빠른 방법인 것 같다).

Fortune 500 회사의 리스트를 뽑고 중에서 IT회사를 골라서 회사의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뽑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지원한다.
: Fortune 500회사의 리스트 내에서 뽑은 이유는 본인이 우선 직업 비자와 그 후에 영주권까지 기업의 스폰서를 받으려면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기업이 유리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실제 이 생각은 적중했다.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인력이 필요한 경우도 많이 생기고 비자 및 영주권 지원을 위한 전담 파트가 있어 관련 지원도 잘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일하면서 제일 신경 쓰이는 부분의 하나가 신분 문제인데 큰 기업일수록 여기에 대한 신경을 덜 쓰도록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LinkedIn, Monster.com같은 리쿠루팅 사이트에 본인의 레쥬메를 올려놓고 리쿠루터들이 보고 연락 오기를 기다렸다.
: 위의 1번이 적극적으로 구직 활동에 나서고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 직접 지원할 수 있는 반면에 2번은 수동적으로 잡 시장에 자신을 포장해서 내놓는 것이다. 각 기업마다 그 기업 내에서 일하는 리쿠루터들도 이 사이트를 보면서 연락을 해 올 수도 있고 기업이 원하는 인재와 구직자를 연결시켜 주면서 커미션을 받는 헤드헌터들도 관심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기업들로부터 인터뷰 제안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본인은 위 1번과 2번 방법을 모두 썼지만 직접 회사 웹사이트에 가서 지원했던 것들이 좀 더 좋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지원 후 연락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지원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고 이 후 과정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2번의 경우 연락은 많이 왔지만 많은 경우 계약직으로 연락이 많이 왔었고 가끔 보면 사기성이 짙은 연락도 많이 왔었다. 계약직은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일하는 조건으로 오는데 외국인인 이상 OPT로 일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일하면 워킹 비자를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금쪽같은 OPT 기간을 허비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리쿠루터는 프로그래밍 관련 교육을 받으면 직장 취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등록할 것을 권하는데 이런 것은 대부분 사기라고 보면 된다. 무조건 믿을 만한 기업에 (가능하면 규모가 큰 대기업) 웹사이트를 통해서 지원하고 이력서를 올릴 수 있는 사이트는 백업으로 사용하기 바란다.

바쁜 학교생활을 하면서 계속 레쥬메를 고치고, 커버레터를 쓰고, 전화 인터뷰와 테크니컬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정말 바쁘게 살았다. 학기 중에는 수시로 전화 인터뷰를 요청하는 연락이 와서 수업 중간에 전화를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업을 어쩔 수 없이 빠지고 집에서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보내는 날도 있었다. 지원한 회사가 많았지만 전체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싶어 지원한 회사와 관련 업데이트 상황들을 모두 엑셀 파일로 정리했었는데 나중에 다시 세어보니 회사에 지원서를 보낸 것만 1300여개에 달했고 본인의 기억으로 한 전화 인터뷰만 해도 70~80번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취업을 준비하는 미국 유학생들은 대부분 경험하겠지만 외국인인 이상 신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 뉴욕의 911 사건 이후로 유학생의 신분 문제에 대해서 더욱 엄격해져서 졸업을 하게 되면 I-20(미국 대학으로 받은 입학 허가서)의 기한이 종료되고 graceful degradation이라고 60일의 기한이 주어져서 그 시기 안에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일 미국 내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싶다면 학교 내의 International Student Office를 통해서 Optional Practical Training(OPT)를 신청하면 되는데 이 OPT를 받고 나서 3개월 안에 직장을 찾아야 한다. 예전 2006년에 미국에 왔을 때 듣기로는 그때는 졸업을 해도 1년 정도를 직장 없이 지내도 미국 내에서 거주할 수 있었는데 이 기한이 2008년부터 줄어서 현재는 OPT 기간이 시작되고 90일 안에 직장을 찾지 못하면 미국에서 나가야 한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구직 활동을 하면 알겠지만 90일 안에 직장을 찾는 것은 아주 힘들다. 나의 경우도 지인이 없는 회사의 웹사이트의 Career 섹션을 통해서 입사 지원을 하면 보통 2~3개월이 걸린 후에 연락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입사 지원을 하면서 그 기업의 입사지원자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고 나중에 이력과 매칭이 되는 일자리가 생기면 관련 HR 담당자가 연락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능하다면 졸업 1년 전부터 꾸준히 구직 활동을 하길 바란다.

예일에서의 첫 학기는 구직 활동에서 별로 진전이 없었다. 구직 관련 프로세스를 잘 모르기도 했고 준비 하는 과정에서 아주 서툴렀다. 그때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예일에 취업 설명회를 와서 캠퍼스 리쿠루팅에 등록을 하고 인터뷰를 보았다. 예일대학교 전산과는 그 당시 상당수 학생들이 졸업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로 가고 있었는데 졸업 통계를 보니 가장 많은 수의 졸업생들이 가는 직장이었다. 그래서 따로 캠퍼스 리쿠루팅도 하고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는 졸업생들을 불러서 전산과에서 피자 파티를 하면서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지곤 했었다.

그해 10월 11일과 12일에 예일 근처의 OMNI 호텔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인터뷰를 가졌는데 전산학과 전체로 메일이 와서 인터뷰 하고 싶은 사람은 신청하라고 했다. 나도 부리나케 신청하니 Confirmation 메일이 와서 10월 12일 9시 30분에 정해진 방으로 와서 인터뷰를 보라는 것이었다.

그 날 혹시나 몰라서 정장을 입고 갔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엔지니어로 지원하는 경우 깔끔하게 청바지와 폴로셔츠 정도를 입고 가면 되지 굳이 불편하게 정장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장을 입고 간다고 해도 결코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날 인터뷰를 봤던 Steve는 처음에 가서 10분 정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본격적으로 테크니컬 인터뷰에 들어갈 때 화이트 보드에 알파벳 리스트를 나열했다. 그리고 이 알파벳 리스트 중에서 첫번째로 반복되는 알파벳을 찾는 알고리즘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1분만 생각해 볼 시간을 달라고 한 다음에 어떻게 C프로그램을 짜야할지 고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프로그램 인터뷰 책에 자주 등장하는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프로그래밍 인터뷰를 한 적도 없었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조금 당황한 상태에서 코드를 화이트 보드에 쓰기 시작했다 (사실 이 문제는 Programming Interview Exposed라는 유명한 프로그래밍 인터뷰 책에 등장하는 문제이다).

약 15분간을 Steve와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횡설수설하다가 시간이 다 되어 그 방을 나와야 했다. 예상했듯이 그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는 더 이상의 진행을 하지 않았다. 프로그래밍 인터뷰의 첫 관문을 넘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이 인터뷰를 계기로 어떤 식으로 테크니컬 인터뷰가 진행되고 어떤 문제가 나오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30분 정도 진행되는 인터뷰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하자(전화 인터뷰든 온사이트 인터뷰든 다 적용된다).

  • 아주 복잡한 문제가 나오지는 않는다.
    알고리즘과 데이터 구조를 잘 알고 있다면 5~10분 안에 풀 수 있는 문제가 나오게 된다. 많은 문제를 풀어 봤다면 보자마자 알 수 있는 문제가 나오기도 한다.

  • 모르는 문제가 나와도 인터뷰를 하는 사람과 토론을 하면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인터뷰를 담당하는 사람도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힌트를 주며 어떤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알려주기도 한다.

  • 질문을 하기 전에 생각 해보고 하자.
    “There is no stupid question.” 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수업 시간에 해당되는 이야기고 구직자를 채용할지를 결정하는 인터뷰에서 쓸 말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보고 토론을 한다면 대부분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이 사람의 지식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채용하는 인터뷰에서 연결리스트(Linked List)의 기본 개념조차 잘 모른다면 아무도 채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감출 것은 감추고 드러낼 것은 드러내는 것이 인터뷰에 임하는 자세이다.

첫 학기가 시작하고 처음 겪은 인터뷰의 실패는 조금 더 마음을 다잡고 전산학의 기초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첫 학기는 정말 힘들었고 결과도 처참했다. 하지만 이런 실패를 경험했기에 좀 더 겸허하게 다음 학기를 준비할 수 있었고 짧은 겨울 방학 동안 프로그래밍 인터뷰 공부를 하면서 다음 학기를 준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힘들었지만 이것도 다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매일 매일 전화 인터뷰를 연습하고 프로그래밍 인터뷰 문제를 풀었다.

미국 유학기 (6) – 힘들고 고달팠던 예일대 재학 시절

예일대학교 도서관 근처 풍경

뉴헤이븐에 모든 짐을 풀고 집도 정하고 조금씩 도시가 익숙해 질 즈음 예일에서의 첫 학기가 시작했다. 사실 예일에 입학하기 전에 석사 프로그램이 2년 과정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학과 홈페이지에 가면 학과 신입생들이 읽어야 하는 가이드가 있는데 귀찮아서 읽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입학하고 나서 읽으니 석사 프로그램이 1년에서 4년까지 유동적으로 할 수 있는데 일정 이상의 성적이 되어야지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만일 1년에 마칠 역량이 된다면 1년에 끝내도 되고, 시간이 안 되고 역량이 부족하다면 4년까지 지속할 수 있는데 졸업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예일 전산학과 대학원에서 석사로 졸업하기 위해서는 학점 평균이 High Pass 이상이 되어야 하고 Honor 학점도 최소 하나가 있어야 한다. (예일은 특이하게 A, B, C 식의 학점이 아니고 Honor, High Pass, Pass, Fail 식의 학점을 준다. 그리고 Honor 학점을 받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리고 그 당시1년에 $32,500에 달하는 학비는 결혼해서 바로 유학 온 본인의 가족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첫 번째가 1년 안에 졸업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가 졸업 후 바로 취업이었다.

예일에 공부한 첫 학기는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국에서 정규 학위를 한 것은 처음이었고 그것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교에서 뛰어난 친구들과 경쟁을 한다는 것이 많은 부담으로 다가왔다(실제로 중국에서 온 동기들의 이력서를 보게 된다면 그 학교 학과 수석도 꽤 있었고 칭화대(Tsinghua)를 졸업한 재원도 꽤 있었다). 언어적 충격, 문화적 충격, 그리고 학업적 충격이 모두 겹쳐서 첫 학기에 느꼈다는 것이 제일 간단하게 예일에서의 첫 학기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예일대학교 전산학과(Computer Science Dept.) 건물

아무튼, 첫 학기의 성적은 정말 처참했다. 첫 학기는 컴파일러(Compiler and Interpreter),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분산 시스템(Building Decentralized Systems), 객체지향 프로그래밍(Object-Oriented Programming), 그리고 연구 윤리(Ethical Conduct of Research)를 들었는데 가장 열심히 했고 재미있게 들었던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은 아쉽게 High Pass를 받았고, 어느 정도 선방한 분산 시스템도 High Pass를 받았지만, 컴파일러와 인공지능 수업에서는 Pass 밖에 받지 못했다. 사실 대부분의 석사 동기들이 Computer Science(이하 CS)를 학부에서 전공했기 때문에 이 수업은 학부에서 듣고 다시 대학원에서 좀 더 높은 레벨로 듣는 것이다. 나는 학부에서 CS가 아닌 Electrical Engineering(이하 EE)를 전공했기 때문에 Data Structure이외의 CS수업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KAIST의 전자와 전산이 졸업 시에 통합되어 졸업증서에는 EECS로 나오지만 실제 세부 전공은 EE). 그래서 첫 학기에서 이렇게 고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두 번째 학기는 모바일 컴퓨팅 및 무선 통신망(Mobile Computing and Wireless Network), 계산 비전 및 생물학적 지각(Computational Vision and Biological Perception), 데이터베이스(Introduction to Databases), 통계 유전학 및 생물정보학(Statistical Genetics & Bioinformatics)를 들었는데 정말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공부를 했다. 우선은 첫 번째 학기에 좋지 않은 성적이 나왔기 때문에 전체 학점을 만회하기 위해서 최소 2개의 Honor를 받아야 했다. 한 학기에 Honor 한 개를 받아도 감지덕지한데 Honor 2개를 받는 것도 무리수로 보였고 다른 과목들도 최소 High Pass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본인이 느끼던 부담감은 상당했다. 또한, 두 번째 학기에 취업 인터뷰를 계속 보면서 취업 준비에도 상당한 준비를 해야 되었기 때문에 하루에 3~4시간을 취업 인터뷰에 할애했다.  만일 전화 인터뷰가 들어오면 공강 시간에 인터뷰를 잡아서 보고 나머지 시간에는 새벽 3~4시까지 학과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정말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졸업할 수 있을지 그리고 미국 취업을 할 수 있을지를 가지고 항상 고민하고 염려했던 것 같다. 우선 경제적인 문제가 관건이었다. 한 학기 정도 생활 할 비용을 들고 와서 나머지는 예일에서 제공했던 국제 학생론(International Student Loan) 프로그램으로 감당을 하고 있었는데 만일 한 학기를 더하게 된다면 한 학기 학비 대충 2000만원에다 의료 보험, 아파트 렌트비, 그리고 생활비를 합해서 거의 3000만원의 비용이 들게 된다. 그리고 만일 어떻게 졸업은 하더라도 미국 취업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OPT 문제로 졸업 후 3개월 정도 안에 미국을 떠나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다른 대책도 마련해 놓아야 했다 (미국 내 무임금 인턴을 하거나 다른 학교에 전학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그 시절만큼 고민이 많고 힘든 적은 많이 없었던 것 같다. 결혼해서 바로 미국에 왔기 때문에 가족도 돌봐야 하고 내 갈 길도 개척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잠을 줄이고 날마다 입사 지원을 하고 전화 인터뷰 기회가 생기면 어떤 일이든 마다치 않고 우선 인터뷰를 봤었다. 그 당시 나에게 회사를 골라간다는 것은 사치였다. 무조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채용하는 곳이면 연봉, 조건 상관하지 않고 지원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어떻게든 졸업을 1년에 하기 위해서 공부에 매진해야만 했었다.

두 번째 학기를 마치고 성적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내가 한 학기 동안 열심히 한 결과에 따라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학기를 끝내고 졸업하지 못한다면 최소 한 학기를 더 해야 하고 그러면 생활비를 합해서 3000만 원의 비용이 더 들게 된다.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지부터 계획이 없었고 안 그래도 온 힘을 다해서 석사 과정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떻게 한 학기를 더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최종 성적이 뜨는 날 성적을 확인한 순간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번 학기에는 하나도 받기 힘든 Honor 학점을 3개나 받은 것이었다. 첫 학기에 Pass를 두 개 받아서 High Pass 평균으로 졸업하기 위해서는 Honor를 2개 이상 받아야 했는데 다행히 졸업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당시 나의 Academic Advisor였던 Holly Rushmeier 교수님도 내 1학기 성적이 좋지 않아서 졸업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2학기 성적이 아주 잘 나온 것을 보시고 아주 기뻐해 주셨다. 예일에서의 1년은 정말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최선을 다하면 길이 조금씩 열린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예일 석사 시절의 성적표. 지금은 한 장의 종이로 남아 있지만 나에게는 그 시절의 고생과 노력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