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tan Lee(이승훈) | May 28, 2016 | Stan's Story
2010년 8월 5일에 뉴욕 JFK 공항을 통해서 미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미국은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어서 나에게는 여전히 미국은 낯선 나라였다. 다행히 한국에서 미리 만나 알고 있었던 예일 로스쿨에 다니던 친구들이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고 한 한인 교회의 사모님께서 운전을 해주셔서 별 문제없이 뉴헤이븐까지 올 수 있었다.
사실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예일대가 위치한 뉴헤이븐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검색을 해보았다. 내가 찾아본 정보에서는 뉴헤이븐에 대해서 좋지 않은 얘기가 많았다. 우선 치안 문제가 좋지 않아서 다운타운에는 밤에 걸어다니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이 도심에 살고 부유한 사람들이 교외에 사는 경우가 많은데 뉴헤이븐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범죄율이 높은 도시여서 밤에 나가는 것은 절대 안되고 낮에도 다닐 때 사람들이 많은 거리로 다니라는 조언도 보았다.
JFK 공항에서 뉴헤이븐까지는 거의 2시간이 걸렸는데 예상했던 대로 뉴헤이븐의 처음 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어두침침하고 음침한 도시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고 그렇게 반가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숙소는 다행히 수소문해서 알게 된 한 예일 경제학과 박사 과정인 형의 방에 묵게 되었다. 처음 와이프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 형은 한국에 계셔서 보지는 못했지만 자기 방을 빌려 줄 정도로 좋으신 분이셨다. 그 방에서 짐을 풀고 샤워를 한 다음에 정말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그 아파트는 전체 빌딩이 10층 정도의 큰 아파트였는데 상당히 많은 수의 입주자들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출입 카드가 없으면 문을 열수도 없었으며 낮에는 관리인이 앞에 앉아 있어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했다. 관리인에게 낯선 얼굴이었던 나와 와이프는 몇 번 들락날락하던 중에 우리가 어디를 방문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듣게 되었다. 나는 잘 안 되는 영어로 설명을 하며 우리가 아는 사람의 방을 서블렛(Sublet)했으며 한동안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서블렛이라는 것은 렌트한 방을 다른 사람에게 일정기간 빌려주는 것이다. 사실 여름에 한국을 방문하는 일이 잦은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서블렛하는 것이 빈번하지만 집주인이 알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좋아하지 않는다) 이게 실수였다. 이 아파트는 서블렛이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관리인은 당장 우리에게 1층 끝에 위치한 관리 사무실에 가서 얘기하라고 했다. 관리인이 계속 보고 있어 우리는 관리 사무실에 가서 시킨대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관리 사무실 매니저의 말로는 서블렛이 금지되어 있으니 우리가 나가야 하고 그 방을 렌트하던 형도 벌금을 받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대신에 우리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겠으니 내일 나가라고 했다.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어제 미국에 도착해서 시차에 조금 적응하고 있는데 내일 나가라니. 그리고 집이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너무 깜깜했다. 근데 이미 관리 사무실에서 그렇게 얘기를 들은 상태에서 나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매일 문 앞에서 관리인이 또 지키고 있으니 피해 다닐 수도 없었다.
오후에 와이프와 함께 근처 호텔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그 아파트에서 가까운 호텔을 무작정 찾아가서 하루 묵는데 비용이 얼마가 드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 찾아간 곳이 The Study at Yale Hotel이었다. 이 호텔은 보기에도 모던하고 깔끔하게 잘 지어진 호텔이었다. 인테리어도 맘에 들고 깨끗해서 괜찮을 것 같았지만 문제는 비용이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루 묵는데 최소 180불이었다. 집을 언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시점에서 여기 호텔에 묵었다가는 예산에 큰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두 번째 찾아간 곳은 Hotel Duncan이었다. 이 호텔은 첫 번째 호텔 근처에 있었는데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건물이었고 특히나 둘러본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서 와이프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호텔비는 하루에 70불 정도로 상대적으로 저렴했었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별로였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이 호텔의 방을 구경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탔었는데 그 엘리베이터가 미국 옛날 영화에서나 보던 쇠창살이 있어 손으로 열고 닫는 아주 오랜 된 것이었다. 내부에는 이 엘리베이터가 뉴헤이븐에서 가장 오래 된 엘리베이터라고 자랑(?)스럽게 적어놓은 종이도 있었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누가 가장 오랜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어할까?)
근처 호텔을 둘러보고 괜찮은 곳을 찾기가 힘들어 이곳 저곳 수소문해서 아파트 렌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근처에 다른 아파트 관리 사무실이 있었는데 이 사람을 통해서 알아보기 그곳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 방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내일 나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떤 집이라도 우선 보고 싶었다. 그 관리 사무실의 사람을 따라서 “Regency”라는 아파트의 방을 같이 구경해 봤는데 스튜디오(Studio: 한국의 원룸과 비슷한 구조. 따로 있는 방이 없고 거실과 키친이 하나로 되어 있고 화장실이 하나 있는 구조) 방이었고 렌트는 825불이었다. 방은 그래도 깨끗했고 지금 지내고 있는 아파트와 멀지도 않아서 짐을 옮기는 것도 수월할 것 같았다. 대충 점검을 해보고 1년 리스 계약을 맺었다.
그 날 오후와 저녁에는 계속 큰 짐들을 옮긴다고 힘들었다. 거의 100킬로가 넘는 짐을 이민 가방 여러 개에 나눠 담고 왔고 이것 저것 자잘한 짐들이 많아 옮기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새로 옮긴 집에는 아무 가구도 없어서 근처 월그린(Walgreen: 미국의 약국 프랜차이즈. 여기에서 식료품과 생활 용품도 판다)에서 7불에 얇은 담요 두 장을 사서 바닥에 깔아놓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뉴헤이븐에서 살았던 아파트: 처음에 와서는 담요 2장을 깔고 생활했다
저녁에 샤워를 하는데 왠걸 샤워기에서 녹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짐을 들고 온 미국으로의 힘든 여행과 여러 일련의 사건들로 지쳐 있던 와이프는 녹물을 보더니 급기야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아파트가 음침하고 위치가 그렇게 좋지 않았고 그리고 상태도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렌트가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와이프 마음에는 그렇게 들지 않아도 이곳에 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키친이 워낙 낡아서 냉장고는 잘 동작하지 않았고 Dishwasher는 물이 새기 일쑤였다.
그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여러 에피소드가 많았다.
우선 아파트가 7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항상 말썽이었다. 중간에 서는 일도 잦았고 고장 나서 아예 운행이 되지 않는 일도 많았다. 6층에 사는 우리로서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6층까지 걸어 올라가고 걸어 내려가야만 했었다. 이게 보통 때는 괜찮은데 만일 장을 보고 온 날에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있으면 짐을 6층까지 옮기느라 정말 힘들었다. 차가 없던 우리로서는 렌트카를 2~3주에 한번씩 빌려서 장을 보러 다녔는데 2~3주동안 필요한 음식과 과일, 그리고 생필품들을 사면 짐이 상당했다. 특히나 페트병에 들어있는 물을 코스트코(Costco)에서 사면 무게가 상당한데 이것을 6층까지 옮기는 것도 큰 일이었다. 그렇다고 곧 반납해야 되는 렌트카에 놔둘 수도 없으니 어쨌든 짐을 나눠서 6층까지 옮겨야만 했다. 한번은 근처 월그린에서 스타벅스 커피를 대대적으로 할인해서 수십병을 사놓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한 병에 그 당시 3500원 정도였는데 거기서는 1달러도 안해서 스타벅스 병 커피를 좋아하던 우리 부부는 이렇게 사 놓고 몇 달을 먹었던 것 같다 (사실 그것 때문에 미국 와서 살이 많이 찐 것 같다).

월그린에서 스타벅스 병커피가 할인하는 날 이렇게 수십 병을 사서 방에 재놓고 먹었다
뉴헤이븐의 겨울은 특히나 추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한 면이 완전 창문이어서 방을 따뜻하게 하려고 히터를 계속 틀어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전기로 동작하는 이 히터가 에너지 효율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특히나 추위를 많이 타는 와이프가 있어 건강을 위해서 밤에는 항상 히터를 틀고 잤었는데 나중에 한 달이 지나고 전기세가 나온 것을 봤더니 거의 450불이 나온 것이었다. 렌트비가 825불인데 렌트비의 거의 절반 이상으로 전기세가 나온 것이었다. 나중에 이 방을 소개시켜 준 부동산 업자에게 얘기했던 그 사람이 아주 놀랬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일 년을 계약을 했으니 전기세를 그렇게 내도 살아야 했다.
화장실은 오래 되어서 냄새가 많이 났고 습기가 항상 차 있어서 곰팡이가 자주 생겼다. 냄새가 심해서 자주 향기가 나는 초를 태워서 냄새를 좀 중화시켰는데 이게 그을음이 많이 생겨서 이사하기 전에 그것을 지운다고 고생하기도 했다. 냉장고도 냉장과 냉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아이스크림을 사와도 금방 녹기 일쑤였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식기세척기였는데 식기 세척을 하다가 완전히 차폐가 되지 않아 거품을 토해내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 바닥에 홍수가 나고 재빠르게 물을 막고 거품을 걷어내야 했다.

가끔 식기세척기가 이렇게 말썽을 피웠다
아파트 주변의 환경은 사실 많이 좋지 않았다. 아파트 바로 뒷편에 Salvation Army라고 사람들이 쓰던 중고용품을 파는 곳으로 유명한 비영리 단체가 있었는데 여기에 Rehap 시설(Adult Rehabilitation Center)도 같이 있었다. 이는 알콜 중독자 혹은 마약 중독자들이 위한 재활 시설이었는데 아파트 창문으로 보면 이 사람들이 항상 보였다. 모여서 담배도 피고 식사도 하고 농구도 하는 일상적인 모습이었지만 재활 센터라 그런지 우리의 눈으로는 이 사람들이 항상 무서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근처에는 큰 주차장이 있고 그 주위에 나이트 클럽이 있었는데 주말에는 사람들이 술 먹고 나이트 클럽에서 나와서 싸우는 일이 잦았다. 한번은 토요일 새벽 한 시쯤이었는데 어디서 기관총 소리 비슷한 총소리가 들려서 화들짝 놀라서 깬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아파트 창문으로 봤더니 그 주차장에서 총을 쏘면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었다. 몇 분 뒤 경찰차 7대가 오고 사람들이 다쳤는지 구급차도 오고 하면서 아주 시끄러웠다. 다음 날 일어나서 봤더니 영화에서만 봤던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주차장에 둘러 있었고 나는 그 근처를 지나면서 여기 저기 흩어진 탄피를 볼 수 있었다.
한번은 일요일 오후였는데 그 주차장에서 자동차가 화재가 나서 폭발한 일도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시끄러워서 창문을 봤는데 차가 불타고 있었다. 어떤 일로 그 화재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차가 화염에 싸여 있었다. 곧 화재 진압차가 와서 그 사태는 진정이 되었지만 그 장면은 아직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 중에 가장 큰 에피소드는 옆집 사람이 죽었는데 그 시체 냄새를 한 달 넘게 맡으면서 살았던 일이다. 우리 부부가 살던 6층은 8가구 정도가 같이 있던 곳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도 많이 있던 곳이었기에 누가 자기 나라 요리를 만드나 싶었는데, 그 냄새가 계속 되었고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관리 사무실도 여기는 따로 없어 어디가 물어봐야 될지 몰랐던 우리로서는 그냥 그 냄새를 참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못 참으면 양초를 사다가 문 앞에서 계속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면 냄새가 조금이라도 덜해지기 때문이었다. 냄새가 심하게 날 때는 정말 20개 정도의 양초를 문 앞에서 태울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해야지 역한 냄새가 좀 덜해지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내가 학교에 가고 없는 날 와이프가 혼자 방에 있을 때였다. 누가 문을 두드려서 봤더니 경찰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을 열어줬더니 경찰이 옆 집 사람이 죽은 지 꽤 되었는데 그 사람 아냐고 질문을 했다고 한다. 와이프가 놀란 마음을 진정하면서 옆 집 사람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잘 모른다고 하니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아마 심장마비가 아닐까 싶다) 방 안에서 죽었는데, 연고가 없어 연락도 안되고 렌트도 내지 않아서 관리인이 문을 따서 열어보니 시체가 부패하고 있었다고 했다. 정말 바로 옆 집에 위치했던 우리로서는 그 냄새를 한 달 넘게 맡고 있었으니 정말 생각만 해도 섬뜩했다.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하더니 시체도 치우고 방 카펫도 완전 걷어내고 청소를 철저히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달이 있다가 새로 이웃이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의 웃는 얼굴에 차마 거기서 사람이 죽었다고 하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기서 어떻게 살았나 싶지만 유학생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던 우리 부부에게는 이렇게 정착한 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불편한 것도 많았지만 살아가면서 조금씩 익숙해져서 그렇게 많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지금도 우리 부부에게 이 아파트는 가끔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by Stan Lee(이승훈) | Feb 5, 2016 | Stan's Story
12월에 한국에 다시 돌아와 원서를 마감하기 시작했다. 2009년도에 당시 미국 대학원들의 원서 접수 마감은 12월 15일까지였다. 보통 원서 접수를 하는 대학교를 정하는 것은 U.S. News의 미국 대학 랭킹과 전공 랭킹을 많이 참조하게 된다. 그 랭킹을 보면서 나는 Computer Science 분야에서 1위부터 50위까지 대학 리스트를 다 뽑아놓고 모든 대학교의 CS 대학원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정보를 수집하고 엑셀 파일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미국 대학원 40개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사실 미국 대학원에 40개나 원서를 쓰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것이다. 교차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 40개를 쓰든 100개를 쓰든 상관이 없지만 다 합격이 된다해도 입학하는 대학원은 하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40개나 쓰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은 2년 전에 MBA를 미국 10개 대학에 썼지만 올리젝을 받은 기억 때문이다. 그래도 10개 중에 하나는 걸리겠지 하는 생각으로 원서를 썼는데 웬걸 모든 대학에서 나를 거절했던 것이다. 충격도 많이 받았고 그 다음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많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에 지원한 경영학 박사 과정도 그 대학의 교수님께서 관심을 가져주셔서 지원하게 되었고 최종 단계까지 갔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고배를 마시게 되어 또다시 실패를 맛보게 되었다. 2년의 연이은 유학 실패로 내 자신이 위축된 까닭도 있지만 나이도 30살이 된 즈음에 이제는 마지막 도전이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탑 20위 대학에 안 되면 탑 50위 권 내의 대학에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불가능하지만 40개의 대학에 원서를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40개의 대학원에 원서를 쓰는 것은 정말 힘들다. 우선 제일 힘든 것이 추천인을 찾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 대학원에서는 대학원 지원 시에 2~3명의 추천인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CS대학원의 경우 직장 상사의 추천서보다는 대학교 교수님들의 추천서가 훨씬 더 영향력을 발휘한다. 본인이 카이스트 재학시 지도 교수님이셨던 유창동 교수님과 실험실에서 1년 정도 일을 했던 박규호 교수님은 졸업 후에도 가끔 찾아 뵙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추천서를 받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40개 모두를 부탁하기에는 너무 양이 많았다. 서울대 경영대에서 지도 교수님이셨던 박진수 교수님의 추천서도 받을 수는 있었지만 MIS 분야에 국한 되어 있었고 CS 분야 추천서를 받기에는 분야가 너무 달랐다. 그래서 예전에 같이 일했던 직장 상사분들께 추천서를 부탁 드려서 어느 정도 추천서 요구 사항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점수가 되지 않아서 토플 시험을 5번 이상을 봐야 했고 GRE에서 좀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일본에서 시험을 봐야 했다. GRE 시험은 원래 종이 시험(PBT, Paper-Based Test)와 컴퓨터 시험(CBT, Computer-Based Test)가 있는데 한국과 중국에서 GRE 시험 후기를 만들어서 그 후기를 보고 점수가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아져서 한국과 중국은 전면 CBT 시험이 금지 되었다. 그 당시에 알려지기로는 CBT 시험은 똑같은 문제 은행이 한 달을 주기로 바뀌곤 했는데 그 바뀌는 주기의 초기에 사람들이 시험을 보고 와서 인터넷 게시판에 그 문제를 기억해서 올리면 비슷한 문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문제가 복구되곤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런 게시판에 있는 문제들을 다 정리해서 올리면 사람들이 이 문제의 답을 외워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경우도 많았다. 문제는 이렇게 GRE 점수를 높게 받은 사람들이 미국 대학원에 갔는데 영어를 심하게 못했다는 것이었다. GRE의 영어 파트인 Verbal은 미국 사람들도 800점 만점에 700점 이상을 받는 경우가 많이 없는데 그렇게 700점 이상을 받은 친구들이 대학원에 합격해 입학해서 미국 교수들이 대화를 해보면 영어 의사 소통 능력이 심하게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미국 대학원에서 조금씩 GRE 점수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GRE 시험을 주관하는 ETS에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가장 부정 행위가 많은 중국과 한국에서 GRE 시험을 1년에 두번씩 정해진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보는 PBT로 바꾸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PBT시험의 문제는 점수를 받기가 CBT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우선 정해진 시간에 문제를 풀지 못하면 못 푼 문제는 점수를 받지 못하게 되고 문제의 레벨도 상대적으로 CBT에 비해 높았다. 반면에 CBT는 주어진 문제에 대한 답에 따라 수험생의 레벨을 조금씩 측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700점 레벨의 문제를 맞추게 된다면 그보다 높거나 그와 비슷한 문제를 내면서 이 수험생이 정말 700점대의 레벨을 가지고 있는지 테스트를 해보고, 만일 그 문제를 맞추지 못하게 되면 680점 레벨의 문제를 내고 그에 따라서 수험생의 점수 레벨의 상향을 조절하는 것이다. 즉 정해진 시간에 모든 문제를 풀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패널티는 있지만 초반에 잘 맞추었다면 좋은 점수를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한국에서 보는 PBT 시험에서는 GRE 점수를 좋게 받을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 비싼 비행기값을 내고 한 번은 오사카에서 두 번의 시험을 보았고 (GRE는 한 달에 한 번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본에 가는 사람들은 보통 월 말에 가서 한 번 보고 좀 더 체류하다가 다음 달 초에 한번 더 보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후에는 도쿄에 가서 두 번의 시험을 더 보았다. 일본 여행이라고 갔지만 10여일의 시간 동안 불도 밝지 않은 싼 모텔에서 하루 종일 책만 보고 단어만 외우느라 여행이라 불릴 만한 추억을 남기지도 못했다.
원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에세이를 쓰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우선 2년 전 MBA 준비를 할 때 10개 대학마다 다 다른 에세이를 쓰면서 에세이에 쓸만한 거리가 잘 정리가 되어 있었고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되는지 많은 책을 찾아보면서 숙지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보통 4~5개의 긴 에세이를 써야 하는 미국 MBA 지원과는 달리 미국 일반 대학원 에세이는 보통 SOP(Statement Of Purpose)라고 1개의 에세이만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40~50개의 에세이를 썼고 그 기록이 있으니 1개의 에세이를 쓰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다만 학교마다 어떤 점에서 매력을 느꼈고 왜 그 학교에 지원하는지만 다르게 써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학교 조사를 하고 그 부분을 다시 쓰는 것이 필요했다.
원서를 쓰는 데만 거의 3~4개월의 시간을 들였다. 학교 조사도 충분히 해야 했고 학교마다 필요한 토플 성적과 GRE 성적을 리포팅 해야 했으며 교수님 추천서가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필요한 서류들도 체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다음 리스트가 2009년도에 본인이 지원했던 미국 대학원의 목록이다 (하이라이트 된 부분이 최종 지원한 대학이다). 여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University of Arizona의 MIS 프로그램에도 지원을 했고 전체 지원서를 쓰고 준비를 한 대학원은 27개이다.

위의 리스트 중에서 최종 지원을 하지는 않았지만 교수님 추천서를 받고 토플과 GRE 점수를 리포팅 하는 등 지원 준비를 계속 했던 대학들이 꽤 있다. 이런 대학들은 지원 데드라인이 다음 해 3월 이후에 있어 지원을 계속 미룬 학교들도 있고 연구 분야가 나와 맞는 분야가 없어 지원하지 않은 대학도 꽤 있다.
다음 해인 2010년 2월이 되자 조금씩 결과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랭킹이 높은 몇몇 대학에서 불합격의 이메일이 오기 시작했다. 유학을 준비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때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기 무섭게 메일을 확인해 보고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메일을 확인해 보는 일이 아주 빈번했다. 본인의 경우에는 벌써 2번의 유학 실패를 겪었기에 더욱 간절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이 시간을 보냈다.
2월 8일에 예일 대학교에서 “Yale University Graduate School Application Decision”이라는 제목으로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만일 합격했다면 분명히 Congratulation이라는 제목으로 도착했을 건데 이렇게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확인하게 하고 또 2월 8일은 합격 통보를 받기에는 좀 빠른 시간인 것 같아서 별 기대 없이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확인했다.
Dear Mr. Lee:
We are pleased to inform you that you have been selected for admission as a full-time student in the Master of Science program in Department of Computer Science beginning with the fall term of the 2010-2011 academic year…(중략)
순간 머리 속이 멍해졌다. 그렇게 기다리던 합격 소식이었는데 또 불합격 했겠지 생각하면서 기대 없이 로긴했는데 갑자기 합격된 것을 확인하니 마음이 얼떨떨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혹시나 싶어서 예일의 Computer Science학과에 메일을 다시 보내 합격 된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집에 다음과 같은 Admission Letter가 온 것을 보고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27개의 대학원에 지원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한 군데만 연락이 와도 성공한 것이었다. 아무리 많은 대학원에 지원을 해도 합격해서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군데뿐이다. 그런데 전산학과에서 첫번째로 합격 소식을 들은 곳이 아이비리그의 명문 학교인 예일(Yale)대학교였다. 나중에 예일의 학생 서비스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던 Linda에게 그 해 CS 석박사 프로그램의 경쟁률이 어땠는지 물어보니 280명이 지원해서 19명이 전산학 석사 입학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경쟁률이 14.7:1이었는데 그 중 합격한 한 명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 지금도 너무나 감사하다.
그 시점을 시작으로 하나씩 어드미션 소식과 리젝 소식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Computer Science 전공 석사로 최종 합격한 곳은 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 Johns Hopkins University, UC San Diego, UC Irvine, UC Santa Barbara이었고 비즈니스 스쿨에서는 MIS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University of Arizona의 Eller 비즈니스 스쿨에서 합격 허가를 받았다.
보통 미국에서는 4월 15일까지 입학 허가를 준 대학교에 대부분 자신이 다닐지 안 다닐지를 모두 알려주게 된다. 어드미션을 여러 군데서 받았다면 최종 자신이 다닐 학교를 고르고 그 학교에는 자신이 다니겠다는 의사 표현을 이메일 혹은 서류를 보내서 밝혀야 된다.
나의 경우에는 제일 고민했던 것이 미시간 주립대(University of Michigan at Ann Arbor)와 예일(Yale)이었다. 예일대의 경우는 아이비리그의 가장 명문대 중의 하나였고 학생 수가 적어서 소수 정예의 수업을 받을 수 있으며 학교 이름으로 인해 취업 시장에서도 강점을 가지리라고 생각했다. 미시간 주립대는 합격한 학교들의 전산학과 중에서 US News학과 랭킹에서는 최고의 학교였고 엔지니어링이 특히나 강한 학교로 유명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예일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학과가 상대적으로 작고 학생수가 적지만 한편으로는 소수 정예로 수업을 받고 교수님과 교류가 좀 더 많은 교류를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아이비리그 최고의 석학들로부터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취업 시장에서 예일이라는 이름이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했다.
(실제 미국 사람들에게 예일을 나왔다고 하면 대부분이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지금 살고 있는 오스틴에서 아이비리그 졸업생들을 거의 보기 힘든 이유도 있을 것이다. 델에서 새로 바뀐 팀의 매니저와의 첫번째 일대일 면담에서 예일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아주 놀란 표정을 보이면서 되물어 보곤 했었다. 인지도가 있는 학교에서 공부했다면 취업 시장에 훨씬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by Stan Lee(이승훈) | Feb 5, 2016 | Stan's Story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고 GRE와 GMAT공부에 전념하고 원서 준비를 하던 찰나 외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외삼촌은 이미 아들이 조기 유학을 가서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유학과 관련된 여러 상황에 밝으셨고 내가 유학에 두 번이나 실패한 것을 알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래서 통화를 하면서 미국에 몇 개월동안 어학 연수라도 하면서 영어를 배우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도 어학 연수같은 것을 가고 싶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기도 했었고 나중에 미국 대학원 유학을 가려고 하는데 굳이 어학 연수가 필요할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비용도 문제였다. 학교 다니는 동안은 과외를 통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었는데 비싼 어학 연수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지도 문제였다.
외삼촌은 내 어머니께 얘기해서 나를 몇 개월이라도 어학 연수를 다녀올 수 있도록 지원해 주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보다 미국을 실제 경험하고 거기서 유학을 준비하면 좀 더 낫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나도 2개월 정도를 UC 버클리에 있으면서 공부하기는 했지만 미국 문화와 그 곳 사람들을 좀 더 경험하고 싶었고 거기서 유학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몇 주간 고민하다가 내가 입학하고 싶은 대학원이 있는 학교의 어학 센터를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렇게 결정한 학교가 애리조나의 투산(Tucson)이라는 도시에 있는 애리조나 대학교(University of Arizona)였다. 사실 어학 연수의 목적보다도 내가 이 학교의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 교수님을 만나고 입학 관련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 더 컸었다. 서울대 경영대에서 본인의 지도 교수님이셨던 박진수 교수님께서 사실 이 학교의 비즈니스 스쿨, 엘러(Eller) 비즈니스 스쿨에서 박사를 받으셨다. 한국 사람들은 애리조나 대학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내가 공부하려는 분야였던 MIS(Management Information System, 경영정보시스템) 분야에서는 미국에서 탑 5 안에 드는 좋은 대학원이었다. 주립 대학이었기 때문에 어학 센터의 어학 연수 비용도 다른 학교에 비해서 훨씬 저렴했고 생활비도 적게 들었다.
2009년 6월에 어학 연수를 위해서 애리조나의 투산이라는 도시에 다시 오게 되었다. 투산은 남부 애리조나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애리조나 주 전체에서는 피닉스(Phoenix)에 이어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도시의 이름을 딴 현대자동차의 “투싼”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애리조나에 도착할 때 비행기에서 보니 도시가 완전 황토색의 사막에 군데 군데 선인장이 있는 삭막한 도시처럼 보였다. 6월에 도착했으니 한여름에 가장 더운 날씨에 사막 도시로 온 것이다. 다행히 홈스테이를 신청해서 같이 살게 된 미국인 할머니가 나와주셔서 공항에서 집으로 쉽게 올 수 있었다. 긴 여행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은 집에서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기로 했다.
같이 살게 된 미국 할머니 캐롤린(Carolyn)은 군대에서도 근무하시고 나중에는 투산에서 경찰로 일하시다가 지금은 은퇴하신 분이었다. 할머니는 몇 년동안 애리조나 대학에 어학 연수를 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홈스테이를 제공하고 계셨다. 홈스테이를 하는 동안은 방 하나에서 생활하고 아침은 시리얼, 아니면 토스트 같은 것을 먹고 학교에 가고 점심은 학교에서 해결하고 저녁만 할머니께서 해 줄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저녁에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할머니와 같이 식사를 하고 대화를 했다. 일대일의 대화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가족 같았기 때문에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나를 가족/친지 모임 같은 곳에 많이 데리고 가려고 하셨기 때문에 다른 여러 미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몇 일을 쉬고 애리조나 대학교의 CESL(Center for English as a Second Language)에 등록을 해서 어학 연수를 시작했다. 어학 연수는 너무 평이했다. 사실 어학 연수 온 학생들의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았고 많은 학생들이 공부에 뜻이 있다기 보다는 미국에서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재미있게 놀다가 다시 자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처럼 열심히 준비하는 학생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PBT(Paper Based TOEFL)기준으로 580점만 맞으면 아리조나 대학교에 조건부로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에 토플 점수만 높이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신기했던 것은 아랍 학생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장학금을 받고 온 친구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사막 기후가 사우디 아라비아와 비슷하고 입학이 다른 대학교보다 수월해서 많이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라마단 기간에는 복도에서도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미국 MBA 준비도 하고 미국 경영대 박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GMAT, GRE, TOEFL 점수를 다 어느 정도 받아 놓은 나로서는 어학 연수는 식은 죽 먹기였다. 사실 다 아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시험을 쳐도 수준이 아주 낮았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도 이제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아무튼 나의 목표는 어학 연수가 아니라 애리조나 대학의 Eller 경영대의 교수님을 만나뵙고 입학처장을 만나보는 것이었다. 애리조나 대학교의 MIS석사 프로그램을 들어가고 나중에는 박사 과정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교수님을 알아놓고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아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리조나에서 어학 연수를 하는 동안 Eller 대학원의 수업들도 청강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의 데이터베이스 관련 수업을 교수님의 허락을 받고 청강하기 시작했고 그 수업을 통해서 Eller 경영대에서 박사 과정을 하는 분을 만나기도 했었다. 그 분과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여러 조언도 듣고 내 진로 상담을 하기도 했다. 또한 실제 Eller 경영대의 곳곳을 둘러보면서 앞으로 내가 여기서 대학원 생활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애리조나의 6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다. 어학 연수를 모두 올 A를 받았고 마지막 졸업 때는 가장 많은 상을 받기도 했었다. 토플과 GMAT을 다시 보고 미국 대학원 유학을 다시 준비했다. 가고 싶은 대학교 리스트를 뽑고 에세이를 다시 썼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교정을 받기도 했다. 잠을 줄이면서 공부했고 놀러 가고 싶은 것도 다 포기하고 주말에는 공부하고 원서 쓰기를 반복했다.
by Stan Lee(이승훈) | Feb 5, 2016 | Stan's Story
서울대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다가 2007년 말 미국 MBA 프로그램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고 미국 경영대 진학 시험인 GMAT(Graduate Management Admission Test)을 공부하고 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카이스트 시절 벤처 기업에 근무한 경력과 학교 졸업 후 병역특례를 하면서 중소기업에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MBA 프로그램에 진학해서 미국 취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지원한 학교가 하버드의 HBS(Harvard Business School), MIT의 Sloan, 스탠포드 GSB(Graduate School of Business), 유펜의 Wharton, 컬럼비아, NYU, 시카고, UC 버클리, 미시간 대학교(앤 아버), UCLA의 Anderson으로 10개 학교였다. 각 학교마다 작성해야 되는 에세이도 너무 다르고 원서비도 너무 비쌌기 때문에(학교당 거의 250달러 이상이었다) 10개 학교만 지원하기로 하고 분주하게 필요한 과정을 거치기 시작했다.
약 6개월 정도 열심히 원서 작성을 끝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나씩 불합격 결과가 도착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지원한 10개 학교 모두에서 리젝트를 받게 되었다. 물론 하나라도 가기 힘든 탑 10의 학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나쯤은 기대했었는데 몇 주동안 실망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2015년)은 7년이 지난 후이기에 왜 내가 다 떨어졌을까 생각을 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 2008년에 미국에 서브프라임 위기가 터지면서 미국 대학원의 경쟁률이 급격히 높아졌다. 원래 경기가 좋지 않으면 미국 직장에 정리해고가 많아지고 구직자들은 직장을 찾기가 더 힘들어 지면서 많은 인력이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고용 시장에 나오게 된다.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이 대학원에 들어가 새로운 학위를 따서 더 높은 연봉과 대우를 받을 것을 갈망하게 된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서 학위를 따는 몇 년 동안 경기가 회복되어 나중에 대학원을 졸업할 쯤에는 직장을 찾기 쉬울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공부를 새로 시작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의 경기가 2008년 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MBA에 지원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입학 허가를 받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 되었다.
- 에세이의 영어가 부족했고 내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영어가 부족하기도 했는데 짧은 시간 안에 에세이를 작성한다고 좀 더 깊이 고민해보지 못하고 MBA 에세이를 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중에 영어를 잘 아는 지인에게 이 에세이를 보였을 때 영어가 많이 부족하다고 진심 어린 조언을 많이 듣기도 했었고 MBA 에세이 질문에 나만의 대답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 나만의 이야기를 심사관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큼 풀어내는 것은 그 당시 나의 역량에 비추어 부족했다고 생각된다.
- GMAT 점수가 충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당시 탑 10 비즈니스 스쿨의 MBA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보통 정해져 있는 마지노선이 700점이었다. 그 해에 5번의 시험을 봤지만 본인은 680점이 최고 점수였다. 그래도 그걸 감수하고 지원을 했는데 아무래도 커트라인 밑의 점수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시 다른 탑 스쿨에 가신 분들의 점수를 보면 700점이 분명히 안되는 분도 있었다. 입학 여부가 모든 것이 복합적인 것이지만 GMAT 점수가 높았으면 좀 더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한국 분들의 추천서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신뢰를 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학교 다닐 때 벤처 기업에서 1년 반, 그리고 졸업 후 병역특례 회사에서 3년 정도를 일하면서 그 당시 상사분들께 추천서를 받았는데 우선 다닌 기업들이 삼성이나 LG 같은 이름 있는 대기업들이 아니었고 글로벌 기업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국 분들에게 추천을 받아서 입학 사정관들이 그 분들의 추천서를 신뢰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MBA 프로그램에 올리젝을 당한 후에 마음을 추스리면서 다음 진로를 준비했다. 우선은 MBA를 가기에는 내 상황과 커리어가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는 일반 대학원으로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2008년 8월에 경영대를 졸업하고 미국 경영 대학원에 박사를 지원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경영대의 경우 석사 없이 바로 박사를 갈 수 있는데 물론 그 경쟁은 아주 치열하다. 미국에서는 경영대 박사를 많이 뽑지도 않거니와 전세계의 수많은 인재들이 경쟁해서 입학하려고 하는 곳이라서 들어가기가 정말 힘들다. 경영대 박사에 비하면 MBA는 상대적으로 들어가기가 쉽다. MBA에 비해서 요구되는 GMAT점수도 낮거니와 (보통 탑 10스쿨의 경영대 박사 과정을 가려면 GMAT점수가 750정도 되는 경우가 많다) 몇 천명에 달하는 MBA 입학자에 비해 같은 학교의 경영대 박사 과정 학생은 10명도 채 안 될 정도로 소수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뚫고 경영대 박사를 받게 된다면 미국 내에서의 취업은 상당히 용이하다. 괜찮은 학교에서 경영대 박사를 받고 졸업했다면 경영대 교수가 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고 연봉도 다른 학과에 비해 경영대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는 최대한 박사를 적게 배출해서 졸업생의 질과 양을 조절하려는 미국 경영대학원 커뮤니티의 노력도 있는 듯하다. 그 높은 관문을 뚫기는 힘들지만 그 문을 통과하면 미래가 상당히 밝게 열리는 것처럼 경영대 박사 과정이 바로 그런 종류의 과정이었다.
서울대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된 한 교수님의 추천으로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경영대 박사 과정에 지원했다. 경영대 박사 과정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GMAT 점수를 보내도 되고 GRE(Graduate Record Examination) 점수를 보내도 되는데 본인은 새로 GRE도 공부해서 어느 정도 점수를 만들어 놓았다. 일반 대학원의 에세이는 MBA에 비하면 상당히 간편했다. SOP(Statement of Purpose)라고 단 한 편의 에세이만 쓰면 되는데 이 글에 본인이 살아온 과정,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연구 등이 복합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원서를 마무리하고 지원을 했는데 2009년 2월쯤에 그 곳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학과 교수님 인터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분 정도의 짧은 인터뷰였지만 경영대 교수님 4분을 상대로 질문 답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당시 시간으로 새벽이었지만 자취하던 방에 인터뷰 예상 질문과 답변을 온 방에 붙여 놓고 진 땀 흐르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모든 분들의 질문을 대답한 뒤 마지막에 앞으로 하고 싶은 연구를 얘기하고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괜찮게 한 것 같았다.
나중에 그 학과 교수님을 통해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인터뷰는 괜찮게 통과해서 경영대 학과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지원자들과의 경쟁이 치열했는지 마지막의 학교 레벨의 추천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 나를 추천했던 교수님의 메일을 보면 아직도 그 때 생각이 나서 마음이 참 아프다.
Mr. Lee,
I would like to inform you that you were not admitted to the doctoral program to the decision sciences department. (…중략…) the application went through the department level but the hurdle was higher at the school level.
I was not planning to inform you the result and let you wait until you receive the formal letter from the school, but out of courtesy, I am letting you know so that you can make proper plans for your future. Personally, I think your scores (GRE and undergrad institutions GPAs) and records are all good so if you plan to apply at other schools (I am not sure whether they still accept applications), I still believe that you have a chance to receive admissions from major US institution.
Best of luck on your future endeavors.
마지막 문장을 보면서 이제 어떡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학교는 졸업하고 1년이 지났는데 MBA와 경영대 박사를 모두 실패한 나로서는 더 이상의 옵션이 없었다. 그리고 그 해는 조지워싱턴대의 경영대 박사 과정에 가겠다고 늦게 결정해서 다른 학교에 지원하는 것은 이미 시간이 늦은 상태였다. 한 몇 주간을 미래에 대한 방황 속에서 보냈던 것 같다.
조금 정신을 추스리고 다시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 되었으니 분명 더 이상 지체하기는 힘들었다. 취업과 결혼을 심각하게 되는 나이에 아직 미래의 방향도 결정하지 못했으니 점차 초조해지고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한번 더 기회가 올까? 나는 다시 기회가 온다면 그것을 붙잡을 수 있을까? 아침을 고시 식당에서 먹고 바쁘게 과외집에 달려가면서 내 미래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국내에서 취업을 해야 되는 것일까? 이제 유학은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다. 학원 강사를 해볼까 싶어서 학원에 가서 면접을 봤었는데 한달 내내 일하고 70만원 주겠다는 말에 기가 차서 관두기도 했었고 학원을 차리는 것도 알아보기도 했었다. 또 시계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 종로에 시계 수리 학원에 3개월동안 다니면서 시계 수리를 배우기도 했었다. 시계를 수입해서 온라인에서 장사를 해보려고 이것 저것 알아봤었는데 도매처도 찾기가 힘들고 온라인 상의 경쟁이 너무 심해서 노력에 비해서 이득이 별로 없겠다 싶어서 그것도 관두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다국적 기업의 면접을 다니기도 했다. 여러 컨설팅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넣었는데 맥킨지에서 연락이 와서 회사에 가서 시험을 보고 면접도 봤었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탓에 고배를 마시기도 했었다. 컨설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몇 달 동안 토론과 면접 연습을 하고 예상 문제도 같이 풀면서 준비를 하지만 본인은 아무 생각없이 입사 원서를 넣었는데 면접을 오라는 말에 준비도 없이 가서 얼떨떨하게 면접 문제를 풀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면접에 갔을 때 맥킨지의 컨설턴트와 1시간 정도 시간을 가졌는데 내 이력과 앞으로 하고 싶은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메인 질문으로 은행 지점을 몇 개 세우면 되겠느냐는 질문에 여러 고민을 하면서 내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런 류의 질문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준비한 적은 없었기에 조금 횡설수설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암튼 1시간의 면접 시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갔는데 예상대로 다음 날 다른 단계의 면접으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컨설팅 회사를 가려면 그곳의 면접을 통과하기 위해서 또 다시 피나게 연습하고 면접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걸 시작할지 말지 많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무엇을 원하려고 컨설팅 회사에 가려는 것일까? 높은 연봉, 아니면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다닌다는 사회적인 명성? 기본으로 돌아가서 내가 정말 컨설팅에 맞는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결론은 아니었다. 그쪽 일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나는 외부적인 것들과 혜택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 생각에 다다르고 나서 나는 내 미래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고민해보기로 했다.
이미 두 번의 고배를 마셨지만 기회가 완전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나이가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아주 많은 것도 아니었다. 아직 마지막 도전을 하기에는 결코 늦지 않은 때였다.
그 생각에 다다르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금 명확해졌다. 다시 한번 미국 유학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서자 서류 합격을 하고 면접 일정이 잡혀있던 컨설팅 회사에 전화해서 면접에 불참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강남에 GRE학원을 등록하고 내가 지원할 학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by Stan Lee(이승훈) | Feb 5, 2016 | Stan's Story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바라보면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정사각형으로 나눠진 블록에 촘촘하게 채워진 장난감처럼 보이던 도시는 조금씩 그 윤곽을 선명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때는 2006년 6월, 서울대 경영학과에 편입을 하고 한 학기를 마친 후였다. 그 전에 다니던 카이스트에서는 지독하게 방황하고 그것을 만회하느라 교환학생이나 어학 연수의 기회조차 잡지 못했는데 새로 시작한 대학 생활에서는 이전에 못 해본 것들을 다 해보고 싶었다.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다음 학기 외국 교환 학생의 기회를 알아보고 그 해 여름에는 미국에서 여름 학기를 들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미국 유학을 꿈꿔왔다. 사실 대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나는 나중에 미국으로 유학 가게 될 것이라고 내 삶을 미리 규정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친구들에게도 나는 나중에 어떻게든 미국에서 공부할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내 자신이 내가 미리 계획한 삶에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조금씩 울타리를 쳐놓기 시작했다.
왜 미국이었을까? 막연하게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미국 유학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그리고 이민자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나라. 그리고 우리나라의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거쳐온 나라. 중학생 때 몇 번이고 읽었던 홍정욱의 “7막 7장”의 이야기는 미국에 대해 더 큰 동경을 가지게 해 주었다. 조그만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온 소년이 갖은 고생 끝에 하버드에 들어가고 최우등 졸업을 하기까지의 여정은 미국 사회에 동경을 가지고 있던 한 소년의 마음을 충분히 설레게 만들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영어 원서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저자가 미국 유수의 대학의 교수님들이였고 카이스트에서의 교수님들의 이력을 봐도 대부분이 미국에 대학원을 유학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에 오신 것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은 내가 배우는 학문의 선진국이었고 그 곳에 가기만 해도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장소였다.
그런데 그렇게 가고 싶던 그 미국을 나는 이전까지 한번도 갈 기회가 없었다. 조기 유학을 가지고 못했고, 해외 여행의 기회도 없었거니와, 군대와 병역 특례 등 여러 상황 때문에 외국에 나가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병역 특례로 중소기업에서의 복무를 끝냈지만 3년 동안의 회사 생활을 하면서 엔지니어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되어 나는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었다. 여러 길을 알아보다가 새로 찾은 기회가 편입을 통해서 서울대 경영대에서 새로 대학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2006년 봄학기에 첫 학기를 시작했고, 그 해 여름 학기는 미국에서듣고 가을 학기에는 독일EBS(European Business School)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생각에 마음이 들 떠 있었다.
처음에 여름 학기를 가려고 알아보던 학교는 Harvard, Stanford,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이하 UC 버클리), UCLA, University of Chicago, Yale, Duke, Cornell, Columbia 등이었다. 사실 여름 학기는 미국의 학교들이 미국 문화 체험과 그 학교 생활 경험을 전제로 외국인들이 지불하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단기간이나마 미국 최고의 대학들에서 수업을 듣고 (임시 학생증도 준다) 그 학교 학생들과 어울릴 기회도 주고 미국 대학교 생활을 체험할 기회도 주지만 그 기간에 비해 비용이 무척이나 비싸다. 또한, 여름 학기에는 해당 학교의 미국 학생들도 여름 학기를 수강하기는 하지만 특히나 캘리포니아의 경우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 수업에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많은 미국 대학생들이 여름에는 인턴십이나 파트 타임으로 일을 하지 수업을 듣는 경우는 많이 없다). 그래서 미국 학교의 여름 학기를 듣는 것은 쉽지만 (따로 입학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의 경우도 사립대는 여름 학기의 학비가 너무 비싸서 가능하면 주립대를 보고 있었는데 UCLA와 UC 버클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나중에는 결국 버클리로 결정을 내렸다.
UC 버클리는 자연과학과 공학으로 특히 유명하지만 경영대도 미국 내에서 Top 5안에 드는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과가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 양성 학교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연고전-고연전 식으로 경쟁하듯 캘리포니아에서는 스탠포드와 버클리가 경쟁 학교로 알려져 있다. 이런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수속을 전문으로 해주는 회사가 있어 이 회사를 통해서 대부분의 수속을 하고 수업료를 납부했다. 서울대에서는 8학점까지 여름학기가 끝나고 관련 서류를 가져오면 학점으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버클리에서 8학점을 듣기로 하고 260만원 정도를 납부했다. 그리고 학생 비자인 F1 비자를 미대사관으로부터 받아서 출국했다.
경영대 편입 동기가 4명이 있었는데 그 중 3명이 같이 버클리에 가서 여름 학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생소했었는데 다행히 편입 동기였던 지은이가 같이 가서 큰 힘이 되었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갈아탄 다음에 샌프란시스코로 약 10시간 정도를 비행한 다음에 도착하게 되었다.
처음 도착하는데 비행기에서 본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은 그야말로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정말 잘 정돈된 도시, 그리고 아름다운 캘리포니아의 자연을 가진 도시였다(물론 샌프란시스코 내부에 들어가면 지저분하고 더러운 부분도 상당하다). 버클리 캠퍼스까지 오는데 돈을 아끼려고 Bart라는 철도를 타고 왔는데 중간에 대만인 친구 한 명을 만나서 같이 얘기하면서 왔고 (그 친구도 버클리에서 여름학기는 수강 할 예정이었다) 그 날은 바로 기숙사 입사가 안 되어서 근처의 YMCA Youth Hostel에 묵게 되었다.
그 날 저녁은 버클리 캠퍼스 근처의 Bongo Burger라는 곳에서 햄버거를 먹게 되었는데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캠퍼스를 돌아보면서 무엇보다 인상에 남았던 것은 학교 안에 수많은 커다란 나무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아주 우거진 산림이 있는 가운데 학교 건물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고 학생들이 잔디밭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편안하게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말 이렇게 예쁜 캠퍼스는 처음이었다(나중에 다른 캠퍼스들을 보게 되면서 순위는 달라졌는데 그 당시에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다음 날에는 기숙사에 입사했다. 기숙사는 6주에 약 140만원 정도를 내는 제일 싼 옵션이 3명이 쓰는 방을 쓰게 되었는데 방에 들어가니 대만인 룸메이트들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그 때 만난 친구가 바로 야오밍(영어 이름으로는 Frank)였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친해지기 힘들어서 인사만 하고 지냈는데 나중에 친해지니 정말 재밌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같이 많이 다녔던 친구가 되었다(야오밍은 지금 대만에서 무역 관련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온 친구는 Ryan이라는 대만 친구였는데 이 친구는 대만 청진에서 MBA과정 중이었다. 야오밍은 방에 자주 있어서 얘기도 많이 했지만 라이언은 여자 친구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던 관계로 주말에 거의 없고 밤 늦게 들어와서 학기 중에는 자주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원래 신청했던 수업은 Investment(투자론), Special Topics in Marketing(마케팅 특강), Business Communication(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원래 버클리에서의 수업은 선수과목 조건이 있어서 이 과목들을 듣기 전에 필요로 하는 과목들을 들어야지 이 수업을 신청할 수 있다. 경영대에서 수업을 한 학기밖에 듣지 않았던 나로서는 이 선수과목이 없는 수업을 들으려고 위의 3 과목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듣고 싶은 것들을 찾아보고 선수과목 조건에 관해서는 교수님 양해를 구해서 결국 듣게 된 것은 International Trade(국제 무역)과 Business Communication 이렇게 두 과목만 듣게 되었다. 사실 많은 수업 중에서 또 듣고 싶은 수업이 있었는데 바로 Legal Aspect of Business (비즈니스 법) 수업이었다. 변호사인 교수님이 비즈니스와 관련된 많은 법률 케이스들을 들고 와서 토론하고 미국 회사법에 대해서 배우는 수업이었는데 첫 수업을 들어가고 나서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나질 않아서 포기하기로 했다. 교수님이 첫날부터 정말 빠르게 강의 계획표를 설명해 주는데 수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2번 이상 발표를 하고 토론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수업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데 발표는 어떻게 준비하며 미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내가 토론을 이끌어 나가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그래도 수업에 미련이 남아서 전공책을 사서 수업을 청강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수업 중간 중간에 지명해서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어(Cold Call이라고 부른다) 한참을 떨다가 이 수업도 그만두게 되었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수업은 북미 등지에서 일을 할 때 회사에서 대화 방법, 옷차림, 관습 등의 비즈니스 예절에 대해서 배우고 문서 작성과 프리젠테이션을 어떻게 진행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배우는 수업이었다. 수업이 그렇게 큰 부담은 없었지만 아직 영어에 익숙치 않아서 가끔 놓치는 부분이 좀 있었다.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 모두가 이름표를 준비해야 되고 자리 앞에 이름표를 놓고 수업을 한다. 이 이름표를 보고 교수님이 가끔 학생에게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것 때문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직 언어의 한계가 많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수업에서 그룹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는데 한 명의 버클리 학생과 두 명의 대만 친구들이 같은 조로 발표를 준비하게 되었다. 학기 중에는 두 가지 발표를 해야 되는데 첫 번째는 정보를 설명하는 Informative Speech, 그리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Persuasive Speech를 준비해서 전체 학생 앞에서 발표를 해야 되었다.
영어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수업을 듣는 30명 앞에서 스피치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떨렸다. 2박 3일 동안 연습했다. 달달 외우려고 했지만 외우는 것은 역시 자신이 없어서인지 어느 정도 노트를 보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나 입에 익지 않아서인지 발음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다. 첫 번째 스피치를 했는데 나중에 교수님께서 내가 한 Capitalism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조금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두 번째 스피치는 예전에 회사 다닐 때 공부했던 우리나라의 DMB 기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교수님께서 상당히 관심을 가지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국제 무역 수업은 Wood 교수님으로부터 배웠다. 회사를 경영하고 계시면서도 틈틈이 버클리로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 수업 소개를 하는 시간에 2번의 시험과 4번의 숙제로 학점이 나간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러면서 수업은 오고 싶은 사람만 오라고 하셨다. 시험 잘 볼 수 있고 숙제 잘 낼 자신이 있으면 안 와도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사실 이런 스타일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강의 스타일이다. 공부하고 싶은 사람만 와서 열심히 수업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수업 분위기도 좋아지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시장통 같은 분위기도 형성되지 않는다.
버클리에서 6주 동안을 공부하는 동안 정말 공부하려면 미국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굳혀졌다. 다양함을 인정하는 사회, 그리고 나이에 따른 불편함이 없는 사회, 그리고 실력이 있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열어놓는 미국이라는 사회에 대해서 좀 더 동경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미국이 다 좋다는 것은 아니다. 그 사회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모순점도 많지만 교육 면에서는 정말 어떤 돈을 들이더라고 배울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