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고 GRE와 GMAT공부에 전념하고 원서 준비를 하던 찰나 외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외삼촌은 이미 아들이 조기 유학을 가서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유학과 관련된 여러 상황에 밝으셨고 내가 유학에 두 번이나 실패한 것을 알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래서 통화를 하면서 미국에 몇 개월동안 어학 연수라도 하면서 영어를 배우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도 어학 연수같은 것을 가고 싶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기도 했었고 나중에 미국 대학원 유학을 가려고 하는데 굳이 어학 연수가 필요할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비용도 문제였다. 학교 다니는 동안은 과외를 통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었는데 비싼 어학 연수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지도 문제였다.

외삼촌은 내 어머니께 얘기해서 나를 몇 개월이라도 어학 연수를 다녀올 수 있도록 지원해 주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보다 미국을 실제 경험하고 거기서 유학을 준비하면 좀 더 낫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나도 2개월 정도를 UC 버클리에 있으면서 공부하기는 했지만 미국 문화와 그 곳 사람들을 좀 더 경험하고 싶었고 거기서 유학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몇 주간 고민하다가 내가 입학하고 싶은 대학원이 있는 학교의 어학 센터를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렇게 결정한 학교가 애리조나의 투산(Tucson)이라는 도시에 있는 애리조나 대학교(University of Arizona)였다. 사실 어학 연수의 목적보다도 내가 이 학교의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 교수님을 만나고 입학 관련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 더 컸었다. 서울대 경영대에서 본인의 지도 교수님이셨던 박진수 교수님께서 사실 이 학교의 비즈니스 스쿨, 엘러(Eller) 비즈니스 스쿨에서 박사를 받으셨다. 한국 사람들은 애리조나 대학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내가 공부하려는 분야였던 MIS(Management Information System, 경영정보시스템) 분야에서는 미국에서 탑 5 안에 드는 좋은 대학원이었다. 주립 대학이었기 때문에 어학 센터의 어학 연수 비용도 다른 학교에 비해서 훨씬 저렴했고 생활비도 적게 들었다.

2009년 6월에 어학 연수를 위해서 애리조나의 투산이라는 도시에 다시 오게 되었다. 투산은 남부 애리조나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애리조나 주 전체에서는 피닉스(Phoenix)에 이어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도시의 이름을 딴 현대자동차의 “투싼”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애리조나에 도착할 때 비행기에서 보니 도시가 완전 황토색의 사막에 군데 군데 선인장이 있는 삭막한 도시처럼 보였다. 6월에 도착했으니 한여름에 가장 더운 날씨에 사막 도시로 온 것이다. 다행히 홈스테이를 신청해서 같이 살게 된 미국인 할머니가 나와주셔서 공항에서 집으로 쉽게 올 수 있었다. 긴 여행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은 집에서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기로 했다.

같이 살게 된 미국 할머니 캐롤린(Carolyn)은 군대에서도 근무하시고 나중에는 투산에서 경찰로 일하시다가 지금은 은퇴하신 분이었다. 할머니는 몇 년동안 애리조나 대학에 어학 연수를 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홈스테이를 제공하고 계셨다. 홈스테이를 하는 동안은 방 하나에서 생활하고 아침은 시리얼, 아니면 토스트 같은 것을 먹고 학교에 가고 점심은 학교에서 해결하고 저녁만 할머니께서 해 줄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저녁에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할머니와 같이 식사를 하고 대화를 했다. 일대일의 대화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가족 같았기 때문에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나를 가족/친지 모임 같은 곳에 많이 데리고 가려고 하셨기 때문에 다른 여러 미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몇 일을 쉬고 애리조나 대학교의 CESL(Center for English as a Second Language)에 등록을 해서 어학 연수를 시작했다. 어학 연수는 너무 평이했다. 사실 어학 연수 온 학생들의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았고 많은 학생들이 공부에 뜻이 있다기 보다는 미국에서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재미있게 놀다가 다시 자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처럼 열심히 준비하는 학생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PBT(Paper Based TOEFL)기준으로 580점만 맞으면 아리조나 대학교에 조건부로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에 토플 점수만 높이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신기했던 것은 아랍 학생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장학금을 받고 온 친구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사막 기후가 사우디 아라비아와 비슷하고 입학이 다른 대학교보다 수월해서 많이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라마단 기간에는 복도에서도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미국 MBA 준비도 하고 미국 경영대 박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GMAT, GRE, TOEFL 점수를 다 어느 정도 받아 놓은 나로서는 어학 연수는 식은 죽 먹기였다. 사실 다 아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시험을 쳐도 수준이 아주 낮았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도 이제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아무튼 나의 목표는 어학 연수가 아니라 애리조나 대학의 Eller 경영대의 교수님을 만나뵙고 입학처장을 만나보는 것이었다. 애리조나 대학교의 MIS석사 프로그램을 들어가고 나중에는 박사 과정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교수님을 알아놓고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아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리조나에서 어학 연수를 하는 동안 Eller 대학원의 수업들도 청강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의 데이터베이스 관련 수업을 교수님의 허락을 받고 청강하기 시작했고 그 수업을 통해서 Eller 경영대에서 박사 과정을 하는 분을 만나기도 했었다. 그 분과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여러 조언도 듣고 내 진로 상담을 하기도 했다. 또한 실제 Eller 경영대의 곳곳을 둘러보면서 앞으로 내가 여기서 대학원 생활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애리조나의 6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다. 어학 연수를 모두 올 A를 받았고 마지막 졸업 때는 가장 많은 상을 받기도 했었다. 토플과 GMAT을 다시 보고 미국 대학원 유학을 다시 준비했다. 가고 싶은 대학교 리스트를 뽑고 에세이를 다시 썼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교정을 받기도 했다. 잠을 줄이면서 공부했고 놀러 가고 싶은 것도 다 포기하고 주말에는 공부하고 원서 쓰기를 반복했다.